2010. 11. 29. 14:57ㆍ여행지/인천
석인상의 모습입니다.
고려왕릉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39년을 있는동안 왕릉이 생겼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대장경은 왜 만들어졌나를 설명합니다.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아한 고려청자 주전자의 모습입니다.
고려문인 이규보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큰 벼슬보다 시를 짓고 불경을 줄겨읽는 문인으로 살아간 당대의 문인이라 소개합니다.
'이규보신도비'의 탁본을 소개해 놓았습니다.
신도비는 죽은 이의 평생 행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석으로
신도는 묘 앞에서 입구까지 낸 길을 말한다. 중국의 경우 한대(漢代)부터 성행했는데, 처음에는 석주(石柱)를 세우거나 간단한 제액(題額)을 써서 표시했을 뿐이고 묘비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한 것은 진(晉)·송(宋)대에 들어서였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부터 묘비를 세우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신도비를 세우는 것이 성행했는데, 태조의 능인 건원릉(建元陵),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 등 왕릉 앞에 세워진 것이 있다. 사대부의 경우에도 생전에 세운 공로나 인품을 기록하여 비석을 크게 세우는 사례가 많았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형식이나 귀부는 생략하고 이수만 갖추기도 했다.
(브리테니커백과)
조선시대때 전란에 대비해 제2의 수도로 강화를 선택하였습니다.
높은벼슬인 종2품이 강화유수에 임명하고 임금의 거처인 '강화행궁'과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임대형식으로 돌아오는 외규장각 도서가 강화도에서 탈취당한 문화재입니다.
향교에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고려때 부터 지방교육기관의 역할을 해온 향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880여년전에 세워졌고 공자상을 최초로 모신(1286년) 향교가 강화의 부속섬인 교동도의 교동향교라고 합니다.
교동도는 낚시하러 자주 갔지만 그런 깊은 역사가 있는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강화 양명학에 대한 소개를 싣고있습니다. 강화학파라는 유파를 형성할 정도로 활발하였다 합니다.
사고(史庫 국가의 중요 서적을 보관하는 곳)의 설명이 있습니다.
'종묘의궤속록'과 '영희전영건도감의궤'
의궤는 ‘의식과 궤범(軌範)’을 뜻하는 말로 조선시대 국가에서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의 전범(典範)으로 삼고자했던 뜻을 함축하고 있다. 모범적인 전례를 만들어 놓고
이를 참고함으로써 후대에 잘못을 범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려는 것이 의궤를 만든 주요한 목적이었다.
의궤는 행사보고서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특히 의궤에 첨부된 그림들은 당시의 생생한 현장모습들을 보여준다.
의궤에 남겨진 기록화들은 오늘날의 사진이나 비디오 테이프와도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서 의궤에 나타난
다양한 시각자료는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당대의 현장상황을 전달하려 했던 우리 선조들의 투철한 기록정신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의궤는 문자 그대로 의식의 궤범을 만들어 뒷날의 사람들이 그 전례를 따르도록 한 것으로서
후대인들이 앞 시기의 의궤를 참고하여 , 국혼(國婚)이나 국장(國葬)등 국가의 주요한 행사를 원활하게 치룰 수 있게 하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의궤에 기록된 주요 행사는 왕실의 혼인을 비롯하여 왕과 왕세자의 책봉, 왕실의 장례, 제사, 잔치, 활쏘기, 태실(胎室)의 봉안,
국왕의 행차, 궁궐 건축, 친농(親農)·친잠(親蠶) 행사, 중국 사신의 영접 등 국가나 왕실 행사 전반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의궤는 조선전기부터 제작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의궤들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전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어 그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으며,
현재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의궤들이 규장각,장서각,파리국립도서관, 일본의 궁내청 등에 소장되어 있다.
왕실의 주요 행사를 의궤의 형태로 남긴 것은 조선시대에만 보이는 독특한 전통으로서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형식의 의궤가 발견되지 않는다.
의궤는 우리나라에서만 비롯된 독특한 형식의 책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의궤에 기록된 내용은 행사의 과정을 날짜에 따라 기록한 전교(傳敎) 등 각종 공문서의 내용을 비롯하여 업무의 분장,
담당자의 명단, 동원된 인원, 소요된 물품, 경비의 지출, 유공자에 대한 포상 등에 관한 내용이며,
필요한 경우 행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반차도(班次圖)와 건물 및 기계의 설계도 등을 첨부하여 당시 행사의
구체적인 절차나 건축물의 모습을 생생하고 입체감 있게 표현하였다.
그런데 의궤에는 행사의 내용에 관한 기록뿐만 아니라, 행사에 참여한 관리와 장인들의 실명(實名),
각각의 물품에 사용된 재료의 수량 및 비용, 그리고 실제 들어간 물품과 사용 후 남은 물품을 되돌려준 사실 등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유효한 내용들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행사 참여자의 실명제는 작업자의 잘잘못만을 가리자는 취지는 결코 아니었다.
무명의 장인 한명 한명의 실명을 국가의 최고 공사보고서에 기록해줌으로써 그들에게 남다른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적극 작업에 참여하게끔 했던 것이었다. (다음백과)
외규장각에대한 설명입니다.
'덕진진경고비' 입니다.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 세겨진 비석입니다.
글의 해석으로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타국의 선박은 통과할 수 업다' 라고 써있습니다.
사진으로 보는 '신미양요' 입니다.
주(酒)자가 들어간걸로 보아 이건 술독입니다.
아이들이 이해 하기 좋은 갯벌에대한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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