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20. 10:54ㆍ여행지/서울
돌담길로 유명한 덕수궁을 찾았습니다.
덕수궁 홈피에서 연혁을 찾아봤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머물게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덕수궁(경운궁)의 시작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했으나, 당시의 궁핍한 국가재정 상황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608년 2월 정릉동 행궁 정전(석어당 추정)에서 승하하고 만다.
선조의 뒤를 이어 이 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을 재건하여, 그해 10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비로소 짓게된다.
병조판서 이항복을 시켜 경운궁의 담장을 두르고 궁궐로써의 면모를 가다듬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곧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머물다 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移御)를 한다.
한편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고, 경운궁 별당(즉조당 추정)에서 즉위한 뒤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된다.
이때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곳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운궁을 아주 떠나게 된다.
이로써 경운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하였다.
이후 영조때(영조 49) '선조가 경운궁(덕수궁)에 거처를 정한 3주갑(180년)과 선조의 기일(승하일)을 맞이해,
영조가 세손(정조)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는' 등 기념의식을 갖기도 하였고,
고종 30년(1893)에 '선조가 경운궁에 거처를 정한 5주갑(300년)을 맞아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난 후 1897년 고종이 다시 이곳으로 환어(還御)하기 전까지 비어있게 된다.
오른쪽 모퉁이에 사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주변을 돌아 봅니다.
대한문 앞입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원래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고 합니다. 크게 편안하란 뜻이라 해석됩니다.
1906년 7월에 수리하면서 지금의 대한문(大漢門)이 되었고 지금의 문은 2005년 해체 보수공사를 한것이라 합니다.
들어가서 바로보이는 석조물을 담아봤습니다.
오래된 건물과 새로 축조한 건물의 차이가 느껴집니다.
좀 들어가다 보니 세종대왕 동상이 있습니다. 덕수궁 안에 세종대왕 동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보이는 사람들은 일본 관광객입니다.
고공의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중화전(中和殿)입니다.
1902년 고종황제께서 정전(政殿 : 나라일을 보는 곳)으로 축조하였다 합니다.
원래는 중층건물이었는데, 2년뒤 화재로 소실되어 단층으로 중건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에는 유독 화재로인한 소실이 많았던것 같습니다.
중화전 아래 좌우로 품계석이 보입니다.
중화전으로 들어가는 중화문 입니다.
외국관광객들이 우리의 고궁에서 저렇게 기념촬영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뿌듯합니다.
멀리 석조전이 보입니다.
왕과 왕비만 다니는 계단을 답도라고 합니다. 거기에 세겨진 용문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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