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고장 영주여행, 선비문화의 중심, 선비촌, 소수서원-2】

2012. 12. 10. 07:43여행지/경상북도

탁청지안으로 들어온 고목을 바라봅니다. 수련잎에 가려있어도 마음까지 투영되는 느낌이 듭니다.

 

 

겨울나무 바라보며 연못을 끼고 한바퀴 천천히 돌아봅니다.

 

 

그옛날의 선비들은 이 탁청지를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서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오래된 고목은 그 길섶을 지키고 있습니다.

 

 

집사람이 무엇을 찾는지 정확하게 압니다. 바로 물고기를 찾고있습니다.

진정 물속에 있는 고기를 찾아내는 재주는 아주 유별납니다.

 

 

어디서나 어떠한 나무든, 고목이 주는 느낌은 아주 특별합니다.

마치 역사의 산 증인을 만난 느낌이 들곤 합니다.

 

 

돌담안으로 서원이 있지요. 과연 무엇을 느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갑니다.

 

 

교육관이 있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곳으로 시작을 합니다.

 

 

영귀천 이라 하여 선비의 물맛이라 합니다. 물맛은 다 비슷하지요.

물이 선비를 만드는것이 아니라 갈고 닦은 수양과 학문이 선비를 만들겠지요.

 

 

서원에 어울리지 않는 불교 유물이 보입니다.

 

 

이런모습입니다.

이곳에 원래 통일신라 초기의 숙수사란 사찰이 있엇다고 합니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사찰의 규모 또한 상당하였다고 합니다.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인하여 사찰이 폐사가 된것으로 추축된다고합니다.

 

 

천천히 둘러봅니다.

 

 

영정각의 모습입니다. 최초의 주자학자인 안향을 비롯 주세붕 등 많은 학자들의 모습이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물론 사본입니다.

 

 

오래된 유물인듯 하였는데, 설명을 제대로 보질 못했습니다.

 

 

자세한 설명보다는 그저 있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드리는 부분으로 하겠습니다.

전사청이라 하였으니 제사를 모시는 준비를 하는곳이지요.

 

 

장서각이라 하였으니, 지금으로 치면 도서관이라 할수있습니다.

 

 

문성공묘로 회헌 안향의 위패를 모신곳이라 합니다.

 

 

직방재와 일신재의 모습입니다. 이곳은 쉽게 설명하면 지금 학교의 교장실, 교무실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위와 아래는 진품, 기둥은 모조품 입니다.

 

 

직방재와 일신재의 모습은 아주 편안하니 좋았습니다.

 

 

학구재와 지락재의 모습입니다. 향교에 가면 동재, 서재 라 일컷는 건물과 같은 용도입니다.

요즘으로 말씀드리면 기숙사입니다.

 

 

지금의 잣대로 본다면 작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본다면 학생이 그리 많지 않고

발굴된 인재에 한정하여 배움과 수양의 길이 열려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지락재의 모습이 약간 특이합니다.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스승의 처소인 직방재, 일신재(直方齋, 日新齋)의 동북쪽에 ㄱ자로 배치되었다.
학구재란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하며

지락재는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한다.
건물의 형태를 살펴보면 중앙의 우물마루 좌우로 각각 온돌방 1칸을 둔 학구재와 달리

지락재는 1칸의 온돌방 외에 나머지 2칸은 우물마루로 처리해 외부공간과 마주하도록 개방했다.
유생들이 학문에 정진하는 공간인 학구재와 지락재는 온돌방과 온돌방 사이에 진리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둘 다 3칸으로 꾸며졌으며, 건물 입면 역시 배움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로

‘공부(工夫)’의 ‘工’자 형태로 지어졌다.
또한 학구재와 지락재는 스승의 거처인 직방재, 일신재보다 한자(一尺) 낮게 뒷물림하여 지어졌는데

이는‘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윤리의식이 건축구도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건물 배치에서부터 예(禮)를 염두에 둔 선인의 인간적인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이 구도를 마주하게 되면 ‘글선생은 만나기 쉬워도 사람 만드는 스승은 드물다(經師易遇 人師難逢)’는

말이 무색해진다. (소수서원 홈피)】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고 역사 속 산책이 아주 좋습니다.

 

 

지금의 교실에 해당하는 강학당입니다.

 

 

소수서원은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으로 나뉘어 있다고 합니다.

공부하는곳과 학문적 지주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곳으로 나뉘어 있는것이지요.

 

 

서원 밖으로 나오면 죽계천 쪽으로 세워진 경렴정과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아주 운치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요즘으로 말하면 쉼터인 것입니다.

시조도 읇고, 학문도 토론하고 했던 곳이라 합니다.

 

 

이쪽이 정문이 되는 셈입니다.

 

 

소수서원에 대해 알아봅니다.

 사적 제55호. 세종대에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祠廟)를 설립했다가 1543년(중종 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추가배향했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와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입원자편급제'(入院者便及第)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후 1546년(명종 1)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10명), 공양절차(供養節次),

서원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 데 주력했다.

백운동서원은 약 30결의 토지 및 18명의 노비, 4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유생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생각되었으며,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후 이황(李滉)에 의해 과거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했다.

특히 그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 이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에서

지방유생의 강학(講學)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敎學)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굳혔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배향했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서원 내에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영정(周世鵬影幀)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