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고장 영주여행, 육지의 섬? 무섬마을의 아침-3】

2012. 11. 30. 09:22여행지/경상북도

마을 뒷편 산자락의 고목에는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집인 까치집이 있습니다.

 

 

만죽재란 현판이 살며시 보입니다.

박수 선생이 무섬마을에 입향하여 건립한 만죽재(晩竹齋)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으로

기와에 그 연대가 새겨져 있으며 반남 박씨 판관공파의 종가이다.

박수( 1641-1699)선생은 영주 무섬마을의 입향 시조로 안동에 터를 잡고 살던 일가가 난세를 피하여

영주로 옮겨온 후 1666년 무섬마을에 터전을 잡게 된 것이 이 마을의 시초라고 한다.(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고택의 역사 만큼이나 예사롭지 않은 돌들이 있었습니다.

 

 

만죽재 앞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입니다.

 

 

누마루도 제법 규모가 있음은 물론이고 나무의 색상이나 느낌이 고색창연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얕트막한 담장에 내려오는 아침햇살이 좋았습니다.

누군가 버려놓은 쓰레기...이곳 사람이 버린것은 아닐터 주워서 쓰레기통으로 보냈습니다.

어딜 가도 쓰레기를 버리면 안됩니다.

내돈 내고 내가 즐긴다고 생각으로 가벼이 여기면 않되겠지요.

내집에서 그러는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우리나라 방방곡곡은 우리땅이지요, 국민이 주인이니까 더럽히면 안되겠지요.

 

 

초가집 댓돌에 걸터 앉으신 노인 한분이 아침햇살에 편안한 휴식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섬마을에서 가장 높은집....  바로 고목에 둥지를 만든 까치가 주인입니다.

 

 

아침햇살을 잠깐 받고있는 무우청의 모습입니다. 잘 말려지면 우리 전통음식의 맛난 재료가 되겠지요.

 

 

토종벌집들도 간간히 눈에 띄곤 합니다.

 

 

아직도 좁은 골목에는 햇살이 들어오질 않는 곳도 있더군요.

 

 

고택앞에 벌통들이 놓여있고 겨울을 준비한 모습입니다.

 

 

아침하늘과 어울어진 반쯤 옷을 벗어던진 나무가 나그네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연탄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난방은 연탄을 사용하고, 취사용으로 개스를 사용하는듯 합니다.

갑자가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각이 납니다.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자신의 몸뚱아리를

다 태우며 뜨근뜨근한

아랫목을 만들던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로 찰 수 있는가?
자신의 목숨을 다 버리고

이제 하얀 껍데기만 남아 있는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길질 할 수 있는가?

연탄 한 장  - 안도현 -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이렇듯 시인은 연탄 한 장에 담긴 철학을 이야기 하는데...

 못난 나그네는 용도를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껍데기인 모양입니다.

 

 

그래서 뉘우치는 의미로 고택 앞에서 생각합니다. 껍데기는 가라고...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재 조립을 한 흔적이 보입니다, 한치의 어긋남이 없어야 하니까요.

이세상 어떠한 건축물이 해체해서 이동하고 고스란히 조립과 재건이 가능한

건축물이 있을까요...? 바로 우리의 한옥 입니다.

 

 

그러한 한옥들이 수백년 이어 내려오는 곳이 이곳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좋은 건축물을 왜 외면하고 그저 콘크리트의 성을 쌓아올린걸가요...?

 

 

기술이 없어서 일까요...  아님 콘크리트가 저렴해서 일까요...?

 

 

아마 내면적 성장이란 것 보다는 그저 눈에 보이는 성장이 필요했던거라 생각이 듭니다.

해서 이런 돌담이 아닌 벽돌로 담을 쌓는것도 마찬가지 이겠지요.

바로 비루한 철학부재, 문명위주의 발상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버린것이지요.

 

 

담장 기와위에 무거운 몸을 의지한 늙은호박은 무슨생각에 잠겼을까요.

 

 

37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시멘트가 들어간 기와인듯 하였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이겨내지 못하고 거친 면을 보여주는 것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규모가 있는 초가집입니다. 비록 지붕이 약간씩 꺼져있지만 새로이 이엉을 올리면 새집같이 바뀌겠지요.

 

 

초가의 추녀와 돌담은 인생을 실어나르는 세월의 기찻길 같습니다.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아도 마음을 놔둘수 있는 우리의 전통적 보금자리의 모습입니다.

 

 

다시금 흙길을 걷게되니 기분도 좋아집니다.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가봅니다. 문이 나타나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렵니다.

 

 

반남박씨 오헌공추모회에사 세웠다는 청퇴정이 이곳에 있습니다.

 

 

청퇴(淸退)...  깨끗하게 물러남을 의미하지요.

고종 경오(庚午 1870)년에 병조참의 오헌(吾軒) 박제연(朴齊淵 1807-1890)이 대원군의 집정에 따른

시류에 편승하지 아니하고 용퇴(勇退)한 일을 기리어 공의 후손들이 세운 정자라 합니다.

나감과 물러남이 쉽지않은 요즘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청퇴정 위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입니다.

 

 

기와지붕이 이어지는 모습이 마치 사극영화속에 들어와있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제 이 무섬마을에도 아침햇살이 많이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청퇴정을 내려와 마을의 다른 곳으로 향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