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고장 영주여행, 육지의 섬? 무섬마을의 아침-2】

2012. 11. 28. 08:21여행지/경상북도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과 인사를 나누며 내성천 뚝방길을 걷습니다.

 

 

마을은 아직도 고요속에 잠들어있는듯 그저 조용하기만 합니다.

이곳도 한옥숙박체험이 가능한 곳이어서 승용차가 보입니다.

 

 

초가지붕도 있어 정겹기만 하더군요.

 

 

무섬마을에 들어와 최초로 만난분입니다. 할머니께서 무우청을 다듬고 계시더군요.

 

 

흙길로 되어있는 뚝방길을 걷고 있자니 시골서 중학교 다니며 걸었던 그 뚝방길이 생각이 났습니다.

시오리길을 한결같이 걸었던 그 시절이 이 길을 통해 추억되고 있었습니다.

 

 

무섬문화촌이란 팻말이 반겨줍니다. 이곳부터 마을을 천천히 돌아보려 합니다.

 

 

정겨운 초가집입니다. 새마을운동이란 이름 아래 저 푸근하고 과학적인 집들을 다 허물고 벽돌벽에

양철지붕 얹어놓고 현대식이라 했던.... 그 씀쓸함.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스했던 집들은 정 반대가 되어버렸지요.

과학적 근거도 무시하고 그저 외관만 번듯했졌지요.

 

 

돌담이 좋아 잠시 머물러 봅니다.

 

 

까막까치밥이 남겨진 감나무...

얼마전 옆집이 감을 따더군요, 다음날 아침에 보니 감은 한개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르구나를 느꼈습니다. 제법 나이가 든 노부부가 살고 있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아침햇살이 토벽을 비추니 참으로 마음까지 따사로와 지는 느낌이 듭니다.

 

 

툇마루엔 약대추가 말라가고 있더군요.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울타리 역할을 해주던 해바라기는 서있는 채로 말라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디.

 

 

이 마을에는 우리의 전통적인 한옥과 초가집들이 있습니다.

조금씩 다른 형태를 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안쪽 공간을 노출하지 않은 형태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듯 합니다.

보시는 가옥처럼 커단 대문이 있는것이 아니고 밖으로 돌출된 누마루가 있고,

그 누마루 옆으로 출입문이 있는 형태입니다.

 

 

가옥의 안쪽 공간은 이렇게 담으로 둘러쳐서 보호하는 그런 모습이 많습니다.

즉 'ㅁ'자 형태의 가옥구조를 지니고 있는것이지요.

 

 

이런 길을 걷다보니 마음까지 차분해 지더군요.

 

 

마을곳곳에 LPG통이 있는것으로 보아 이 장작은 따로이 용도가 있는 모양입니다.

 

 

한옥의 운치를 대변해주는 누마루의 모습입니다.

커다란 대감댁 사랑채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않는 크기지만, 나름의 멋이 느껴지더군요.

 

 

출입문 위 숨구멍에 걸어놓은 가시오가피 나무는 아마 액이나 사악한 기운의 범접을

막기위한 액막이가 아닌가 합니다.

 

 

두칸 남짓한 누마루의의 문들... 차분함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저 다 작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안쪽으로 별도의 사당까지 갖추고있는 가옥들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숙박체험을 한다면 기와집이 좋을까, 아님 초가집이 좋을까...?

초가집에서는 자봤으니 이왕이면 기와집에서 자보는것이 좋겠네요.

 

 

저런 곳에서 하룻밤 유하고 나면 기분이 남다를것 같습니다.

 

 

다들 마당이 충분한 넓이로 있어 보기에 갑갑하지 않고 여유로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당은 옛 용도는 사라지고 주차장으로 사용되는듯 하였습니다.

 

 

50여 가구의 고가로 형성된 마을입니다.

 

 

마을분 한분 뵙고는 민박온 아이 한명.... 사람보기 귀한시간인가봅니다.

 

 

담이 참 좋습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이곳에 민박오는 손님들을 위한것인지,

길이 콘크리트 포장으로 덮혀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산책하기에 좋은곳이라 천천히 살피며 걸어봅니다.

 

 

무송헌(撫松軒)이라...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집이란 뜻이라 하네요.

그 주인이 되시는 김담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김담은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천문학자로 이순지(李純之)와 함께 역법서인 ‘칠정산 외편(七政算外篇)’을

편찬하는 등 천문·역법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본관은 예안이고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이다.

1416년(태종 16년) 영주 귀성대(龜城) 동쪽 그의 외가였던 삼판서 고택(三判書 古宅)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고려 때 중랑장인 노(輅)이고 아버지는 현감 효량(孝良)이다.

1435년(세종 17년) 그의 형 증(증)과 함께 정시 문과에 나란히 급제해 ‘집현전정자(集賢殿正字)’ 겸

‘경연사경(經筵司經)’에 제수됐다. 1436년 간의대에서 천문을 관측하는 일을 맡았고,

1439년 집현전박사가 돼 이순지와 함께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한 최초의 역법서인

‘칠정산 외편(七政算外篇’을 편찬했다.

그의 출중한 능력은 이조정랑으로 재직하던 1447년 문과 중시(과거 급제자를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

합격으로도 알 수 있다.

김담은 중시에서 ‘을과’ 1등 3인 중 두 번째로 합격했는데 첫째가 성삼문이고 셋째가 이개였다.

같은 을과 2등에 신숙주와 박팽년, 유성원, 최항 등이 있었다 하니 당시 합격생들의 면면으로도

그의 뛰어남을 알 수 있다.

또한 김담은 세종대왕 당시 집현전에서 17년간 재직하며 한글 창제와 각종 예법 개정 및 문물제도

정비에도 참여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 역법서인 ‘칠정산’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천문 계산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이 칠정산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가졌는지는 칠정산 내편 서문에 “이리하여 역법이 아쉬움이 없다”라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김담은 세종과 문종, 세조에 걸쳐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1463년(세조 9년)에는 이조판서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이듬해인 1464년 7월에 별세했고 세조는 2일 동안 조회(朝會)와 저자를 정지시키고

이틀 만에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김담 선생은 문신으로서 학문이 드높았을 뿐만 아니라, 천문학과 산술에도 뛰어나 세종대왕의

치세와 업적에 크게 공헌했다.

또한, 평생 청렴결백한 성품과 엄격한 공사구분으로 후세에 큰 귀감이 된 자랑스런 영주의 선비다. (영주시민신문) 

 

 

아주 고색창연함은 약간 부족하다 하여도 옛 정취는 고스란히 전하여 옵니다.

 

 

사무당이란 당호가 걸려 있습니다.

뜻을 자세히 알 수 는 없었지만 작은 글씨로 충효를 다하지 못했음을 탓하는 듯한 글이 있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