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따라 강화도 반나절-1】

2012. 9. 21. 06:19여행지/인천

얼마전 집사람이 된장이 다 떨어졌다고 합니다.

장을 담궈먹지 않는 요즈음, 전국의 맛있다는 장은 조금씩 먹어봤습니다.

그 중에서 강화도 장흥저수지 부근에 있는 욕쟁이할머니 보리밥집으로 갑니다.

전에 강화도로 낚시를 다니다 알게된 집입니다.

장맛이 좋아 집사람하고 자주 가는 집입니다.

할머니 모습은 지난해 부터인가 뵙질 못한것으로 보아....

여하튼 된장도 살 겸 해서 강화도드라이브길에 나섰습니다.

밥집에 도착을 하니 구름이 인사를 건네고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어느새 고추는 다 수확을 한 모양입니다.

 

 

바로 옆에있는 성공회 초지교회의 모습입니다.

 

 

보리밥도 든든히 먹었겠다, 장도 구입을 했으니... 강화도 한바퀴 돌아보고 나가려 합니다.

저 구름을 따라 강화도 한바퀴 돌 요량입니다.

 

 

해안도로 따라 가다 동검도 입구에서 뻘을 바라봅니다.

 

 

언젠가 저 붉그레한 함초를 수확하는 노인을 뵌적이 있었지요.

 

 

다시 해안도로 따라 도착한 포구입니다. 여기저기 적당한 포구들이 많은 강화는 그저 이렇게 들리기만 해도

어촌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뒷쪽으로 멋진 펜션도 있습니다.

 

 

집사람은 어시장을 잠시 돌아보고, 전 주변의 모습을 담아봅니다.

 

 

물이 모두 빠져나간 뻘위의 배들은 언제봐도 편안한 모습이어서 좋습니다.

 

 

어부들의 한가한 휴식도 좋습니다. 거친 강화도의 물살과 매일매일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서 이러한 만남을 할수있는 강화도는 참으로 매력이 있는곳입니다.

 

 

바닷물 빠지니 갯벌도 쉬고, 어선이 쉬니, 어부도 편안한 휴식에 들어간 포구가 좋습니다.

 

 

쉬고있는 배들에게 다시보자는 약속을 남기고 길을 따라갑니다.

 

 

커다란 측백나무(?)가 있는곳에 왔습니다.

 

 

바로 이건창선생 생가 입니다. 헌데 좀 민망한 모습입니다.

마치 이발을 하다가 놔둔 머리같습니다.  무언가 연유가 있겠지요.

 

 

문학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숭양 가는 길에" 라는 작품입니다.

"개성을 육년 사이에 다섯번을 지났지만, 부소산과 체하동도 들르지 못했네.

자세히 헤아리니 일생동안 벼슬살이에서, 마음에 맞는 일보다는 몸만 고달팠네."

대 문장가였던 선생의 마음이 고스란히 덤겨있는 내용인듯 하였습니다.

 

 

그래도 안쪽의 집안은 깔끔하게 되어있어 괜찮았습니다.

 

 

명미당(明美堂)이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현판에 매천이라 쓰여진 것으로 미루어 매천야록의 저자이신 매천 황현선생의 휘호인듯 합니다.

 

 

참으로 깔끔하고 단아한 모습입니다.

 

 

이건창 선생에 대해 알아봅니다.

가학(家學)을 이어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했으며, 조선시대 당쟁 연구에 필요한

〈당의통략 黨議通略〉을 지었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鳳藻), 호는 영재(寧齋).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시원(是遠)이고, 아버지는 상학(象學)이며, 어머니는 윤자구(尹滋九)의 딸이다.

개성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의 세거지(世居地)는 강화였으므로 계속 강화에서 살았다.

형제인 건승(建昇)·건면(建冕) 및 종형제인 건방(建芳) 등과 함께 할아버지로부터 가학인 양명학을 전수받았으며,

강위(姜瑋)·김택영(金澤榮)·황현(黃玹) 등과 교유했다.

1866년(고종 3) 15세 때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19세 때인 1870년에야 홍문관직에 나아갔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뽑혀 청나라에 가서 청의 문장가인 황각(黃珏)·장가양(張家驤)·서보(徐郙) 등과

교류했으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가 감사 조병식(趙秉式)의 비행을 조사하고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여 파면시켰다.

그러나 조병식의 사주에 의한 무고로 벽동군에 유배되었다.

1년 뒤에 풀려나 공사(公事)를 철저히 수행하다가 권세가들의 공격으로 귀양까지 가게 되자,

그뒤 벼슬길을 멀리했다.

그러나 왕이 간곡한 말로 부르자 1882년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흉년을 당한 농민들의 구휼에 힘쓰는 한편 세금을 감면하여 주기도 했다.

그뒤 부모의 상을 당하여 6년간 집상(執喪)을 마치고 1891년 한성부소윤이 되었다.

이때 외국인이 서울의 가옥과 토지를 매점(買占)하는 일이 있자,

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하여 청국공사(淸國公使)의 항의를 받았으나,

"나는 내 서울 백성하고 말하는 것이지 외국과 맺은 조약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청국의 압력으로 이듬해 보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3년 함흥부에 안핵사로 내려가 난민을 다스리고, 관찰사의 잘못을 낱낱이 조사하여 파면시켰다.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의 협판·특진관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했으며,

1896년 해주관찰사에 제수되었을 때도 사양하다가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특지(特旨)로 2개월 뒤에 풀려나 향리인 강화에서 은거하다가 2년 뒤 47세로 죽었다. (다음백과)

참으로 훌륭한 분입니다. 역시 매천선생과의 인연도 있었습니다.

 

 

빨리 대문의 지붕에 새옷을 입혀야겠습니다.

 

 

담장 옆으로 잘 조성된 묘지가 있더군요. 이건창 선생의 묘는 아닌듯 했습니다. 묘소는 다른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지붕을 잘 보수하시기 바랍니다.

 

 

대문을 나섭니다.  이제 외포리쪽으로 넘어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