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여행, 함양의 가볼만한 곳, 신라의 대관림, 상림공원-4】

2011. 10. 27. 07:02여행지/경상남도

연꽃과 나무를 액자삼아 함양의 산을 담아봅니다. 야트막한 산아래 몇몇가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1/5쯤 올라가서 숲으로 돌아왔습니다.

시간도 그렇지만 계속 햇빛속에 걸어다니니 지치기도 하더군요.

아내는 숲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고 저는 반대편으로 가보기로 합니다.

 

 

반대편에 오니 하천이 있고 그 옆으로 상림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멋진 다리가 하천을 가로질러 놓여 있습니다.  대죽교라고 합니다. 하늘을 배경으로 담아보니 그림이 괜찮아 보입니다.

 

 

숲을 중심으로 양쪽에 이런 산책로가 있고 또 숲 안으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아 골라서 걷는 묘미가 있습니다.

 

 

멀리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분명 함양이 배출한 훌륭한분이란 생각에 가까이 가보기로 합니다.

 

 

의병장 권석도(權錫燾)님의 동상이었습니다.

1880(고종 17)∼1946. 조선 말기의 의병장·독립운동가. 일명 윤일이(尹一二) 또는 권명구(權命九). 경상남도 함양 출신.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8월에 기우만(奇宇萬고광순(高光洵김동신(金東臣) 등이 회합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 때 창의(倡義)에 가담해 의병진에 들어가서 고광순의 휘하에서 지리산 연곡사(燕谷寺)·쌍계사 등지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10월에 고광순이 연곡사에서 전사하자 의병들의 여론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선봉장에 이학로(李學魯), 중군장(中軍將)에 김경각(金敬珏)·우수보(禹守甫), 후군장(後軍將)에 박매지(朴每之)를

임명하는 등 의병진을 정비하고 지리산 일대를 근거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경상남도 하동에서 박인환(朴仁煥)의 권유로 그의 의병진에 가담하였다.

박인환과 의병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08년 6월 부하 5명을 무장시켜 하동의 여건상(余健相)으로부터 1천냥(兩)을

10일 후에 출연(出捐)한다는 증표를 받아내는 등, 각 고을의 부호·유지들로부터 군자금과 무기를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하동의 일본군 수비대에 잡혔다.

잡힌 지 20여 일 만에 구금되어 있던 하동주재소에서 탈주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토벌대의 추격으로 가슴에 총상을 입어 장기간의 치료를 받았다.

상처가 거의 아물자 이듬 해인 1909년 3월 다시 이학로 등과 합세해 진주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며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진주에서 행상으로 변장해 민가에 투숙하고 있던 중 잡혀, 12월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징역형을 언도받았다.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서 형이 확정되어 6여 년를 복역하다가 1916년 6월 가석방되었다.

1918년 2월 다시 요시찰인(要視察人)이라는 명목으로 검거되어, 미결수인 채로 옥고를 치르다가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의 무죄판결로 석방되었다.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참고문헌≫ 대구공소원판결문
≪참고문헌≫ 진주경찰서장 정보보고
≪참고문헌≫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해방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조국의 광복을 못보고 돌아가셨습니다.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장군의 의연한 모습을 상림과 더불어 아둔한 후손의 기억에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