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27. 07:04ㆍ여행지/경상남도
함양이 배출한 훌륭한 선조들의 흉상으로 공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저 일정한 순서없이 소개 하려 합니다.
의제 문태서(義齊 文泰瑞) 의병장 이십니다.
【본관은 창원. 본명은 태현(泰鉉). 태서(泰西)·태서(泰瑞)라고도 한다.
1904년 금강산에서 병서를 배웠으며, 1905년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팔공산으로 이동한 뒤 장수읍 함락, 무주 부남면 습격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후 무주 덕유산을 근거로 삼남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1907년 12월 각도 의병부대가 서울을 총공격하려고 할 때 호남군 100명을 이끌고 참가하여 13도연합 의병부대 중
호남창의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총대장인 대한관동창의장 이인영(李麟榮)이 부친상 때문에 귀향하면서
서울진격계획이 좌절되자 무주로 돌아왔다. 1908년 2월 무주주재소를 습격하다가 붙잡혔으나 탈출했다.
4월 신명선(申明善) 부대와 장수읍을 습격한 뒤 학교와 군청 등을 불태우고돌아갔다.
그후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 습격, 5월 남원 이문성 동북방 전투, 10월 경부선 이원역 습격·방화 등 활동을 계속했다.
11월 이후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하여 금산·영동·옥천·상주·청주·보은 등지에서 활동했다.
1910년 서울로 진격하고자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다시 덕유산으로 돌아와 재기를 꾀하던 중
1911년 8월 붙잡혔다. 대구감옥에서 서울로 옮겨진 뒤 1913년 2월 옥중에서 자결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박지원(朴趾源, 1737년 ~ 1805년 음력 2월 5일)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사상가, 소설가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 계열로,
상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있다.】
'열하일기로도 잘 알려진 위대한 인물이지요.
노 진(盧 禛)[1518~1578]은 조선 중기 명종과 선조 연간에 주로 활약한 문신으로,
30여 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지례현감과 전주부윤 등 외직에 나가서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성리학과 예악에 밝았다.
노진은 1518년(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효심이 뛰어나 노모를 봉양하느라 지병이 악화되어 1578년 향년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천거로 박사가 되었다.
1555년에는 지례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아 청백리로 뽑혔다.
1560년 형조참의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는데,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지원하여 담양부사와 진주목사를 지냈다.
1567년 충청도관찰사와 전주부윤을 지낸 후, 다시 내직인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571년 다시 노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가 되었고, 이듬해 대사간·이조참의가 되고,
경상도관찰사·대사헌 등을 지냈다. 1575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한 후 신병을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평소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등의 학자들과 도의(道義)로써 교유하였다.】
참으로 효심이 지극하신 분입니다.
뇌계 유호인(兪仁好)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뇌계(溪). 아버지는 음(蔭)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봉상시부봉사(奉常寺副奉事)가 되었다.
147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1480년 거창현감이 되었다. 이어 공조좌랑·검토관을 거쳐,
1487년 노사신(盧思愼) 등이 찬진한 〈동국여지승람〉 50권을 다시 정리해 53권으로 만드는 데 참여했다.
그뒤 홍문관교리로 있다가 1488년 의성현령으로 나갔으나, 백성의 괴로움은 돌보지 않고 시만 읊는다 하여 파면되었다.
1490년 〈유호인시고 兪好仁詩藁〉를 편찬했다. 1494년 장령을 거쳐 합천군수로 나갔다가 1개월도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시·문장·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3절(三節)로 불렸다. 특히 성종의 총애가 지극했는데,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외관직(外官職)을 청하여 나가게 되자 성종이 직접 시조를 읊어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저서로 〈임계유고〉가 있다. 장수 창계서원(蒼溪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역사 시간에 배웠을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입니다.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숙자(叔滋)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숙자는 고려말·조선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로, (김숙자선생은 포은 정몽주의 제자가 아닌 목은 이색의 제자입니다. 포은의 제자라고 하는 이들 거의 대부분이 목은의 제자입니다. 포은 선생도 훌륭했지만, 포은은선생은 조선에서 띄운 충신이지요. 이유는 포은선생은 이성계의 부하(종사관)였거든요. 허나 목은선생은 이성계의 스승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한편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은데 혁혁한 공을 세운이가 포은 정몽주 선생과 정도전이었습니다. ..황당하시다면 역사공부를 원전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원전에는 그래요. 정무주 재평가를 찾아 보세요.)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1446년(세종 28) 과거에 응시, 〈백룡부 白龍賦〉를 지어 김수온(金守溫)의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했다.
그뒤 형 종석(宗碩) 등과 함께 황악산(黃嶽山) 능여사(能如寺)에 가서 독서에 힘써 학문을 크게 성취했다.
1451년(문종 1)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며 종직의 문인인 조위(曺偉)의 누나와 결혼했다.
1453년(단종 1) 태학에 들어가 〈주역 周易〉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하여 동료들의 경복(敬服)을 받았다.
이해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교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 世子嬪韓氏哀冊文〉·
〈인수왕후봉숭왕책문 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1464년 세조가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되면서 관인(官人)으로서 본격적인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로 벼슬이 올라갔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늙은 어머니를 모신다고 하여 외직으로 나가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했다.
이듬해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노례(養老禮)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승언(李承彦)·홍유손(洪裕孫)·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을 기른 것도 이때의 일이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弘文館應敎知製敎) 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과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이 무렵부터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사림파(士林派)를 형성,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자들과 함께 유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復立運動)을 전개하여 1488년 그 복립절목(復立節目)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향촌사회에서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1485년 사복첨정(司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인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재혼했다.
1489년에는 공조참판·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1492년 사망하여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 서산(西山)에 묻혔다.】
그 유명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알아보고 갑니다.
조의제문 【6년 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이종준(李宗準)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의 건의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라의 유명한 학자요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입니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 하고, 5두품이나 4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 된다"라고 하여 경시한 점과,
진성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西京:長安)에 체류한 지 7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 뒤 동도(東都:洛陽)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876년(헌강왕 2)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이 후에 〈중산복궤집 中山覆簣集〉 5권으로 엮어졌다.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879년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880년 고변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특히 881년에 지은 〈격황소서 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했으며, 〈대숭복사비명 大崇福寺碑銘〉·
〈진감국사비명 眞鑑國師碑銘〉 등을 지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889년(진성왕 3) 재정이 궁핍하여 주군(州郡)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897년 진성왕의 양위(讓位)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왕의 〈양위표 讓位表〉와 효공왕의
〈사사위표 謝嗣位表〉를 찬술하기도 했다.
그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涼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의 가작(假作)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 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밖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
〈석이정전 釋利貞傳〉과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감국사·낭혜화상(朗慧和尙)·지증대사의 비명과 〈대숭복사비명〉을 묶은
〈사산비명 四山碑銘〉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바로 이 상림의 원형인 대관림을 만드신 분이 이 분입니다.
【조승숙(趙承肅, 1357년 ~ 1417년)은 두문동 72현이며, 고려의 충신이었다.
1357년 함양에서 태어났다. 1384년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원나라에서 저작알을 배우고 귀국한 후
1390년, 33세에 부여감무(扶餘監務)를 지내다가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그 후 고향 함양에 가서 여생을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럼 두문동 72현이란 무었일까요...
【고려(高麗)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칠십이현이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빗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이름이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두문동 72현’이란 고려가 망할 때 이성계(李成桂)를 비롯한 조선의 개국 혁명 세력에
대하여 반대한 고려의 유신(遺臣)으로서 이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킨 충신열사(忠臣烈士)를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두문동’의 ‘두문(杜門)’이란 말은 ‘문을 닫다’ 또는 ‘문을 막다’는 의미로
두문동이란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고, 외부와 단절하며 사는 洞里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을 개국한 혁명 세력과 단절함으로써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키고자 하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두문동이란 명칭은 기존 존재하였던 지명이 아니라 고려의 절신(節臣)이 은거한 이후에 붙여진 명칭이다.
두문동 72인의 72인은 공자의 제자를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의 제자는 3000명이었는데 몸소 육례(六藝)에 통달한 제자는 72인이었다.”라 하였다.
그리고 같은 책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서는 77인이라 하고 그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또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는 “72인이라”)하고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에는 76인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부터 대체로 ‘사기’와 ‘공자가어’의 공통의 수인 72를 공자의 승당제자(升堂弟子)의 수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또 대체(大體)의 수, 즉 큰 수를 칭하여 70제자라는 말로도 썼다.
실제로 두문동 72현을 72子 또는 70子, 70자도(子徒)로 칭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수의 일컬음이 ‘공자’ 고제자(高弟子)인
‘승당제자’를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에 72라는 숫자는 구체적인 사람의 수를 지칭하기보다는 ‘다수의 현인(賢人)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문동 72현’이란 말은 공자의 제자 중에서 고제자(高弟子)를 지칭하던 수와 관련을 지어
우리나라에서 형성된 독특한 용어로서 고려 말에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유교적인 불사이군(不事二君)
또는 수절불이(守節不貳)의 절의 정신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어지게 되었다.
태학생 임선미(林先味), 조의생(曺義生)등의 고려 절신(節臣)이 숨은 곳을 두문동이라 하고 그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부른 것은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일찍이 지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이 영조 이전까지의 공식적인 문헌인 실록(實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논의는 구전으로 민간에서 통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태종 12년(1412, 임진)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고려조에 사헌부 장령을 지낸 서견(徐甄. 호는 麗窩)이
금주(衿州)에 은거하며 살 때 고려에 대하여 사모하는 시를 썼는데 이 시를 쓴 서견에 대하여 의정부에서
죄를 줄 것을 청한 기사가 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천년의 새서울이 한강 너머 있는데(千載新都隔漢江)
충성하는 신하들 가지런히 밝은 임금을 돕네(忠良濟濟佐明王)
삼한을 통일한 공 어디에 있느뇨?(統三爲一功安在)
문득 전조 왕업이 길지 못함 한하노라.(却恨前朝業不長)
이 오언고시(五言古詩) 기승(起承) 두 구절에서 ‘천년의 신도(新都)와 충성스런 신하들이 가지런히 밝은 임금을 돕네’라고
한 말은 조선의 개국을 찬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전결(轉結) 두 구절의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이라고 한 말과
‘전조의 왕업 즉 고려의 왕업이 길지 못함을 한하노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은연중 조선의 개국을 기롱(譏弄)하고 있는 말이다.
이 사실은 즉각적으로 태종에게 보고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왕은 “서견이 조선의 조정에서 벼슬을 아니하고
전조(前朝)의 신하로서 추모하는 시를 지었으니 또한 착하지 아니한가?”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서견이 북면(北面)하여 나를 섬기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우리의 신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길재의 예를 들면서 더 이상 죄를 묻지 말 것을 하교하였다.
이 예는 서견이 다행스럽게 죄를 면할 수 있었지만 이미 당시에 고려의 유신(遺臣) 즉 두문동 72현의 행위는
상당히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하여 공식적인 논의는 할 수 없었으며 이러할 경우 중죄로 다스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태종조에 정몽주(鄭夢周, 1337~1392)에게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의 증직(贈職)과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고,
세종조에는 그의 아들 정종성(鄭宗誠)에게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의 관직을 제수하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정치적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두문동 내지는 두문동 72현에 대한 말은 영조실록(英祖實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영조는 즉위 16년(1740, 경신)째 되는 해에 송도(松都)에 있는 재릉(齊陵))과 후릉(厚陵)을 참배[奉審]하기 위하여
8월 29일에 행차를 하여 경기도 파주에 주차(駐次)하였고, 이튿날 30일 저녁에 송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9월 1일에 송도를 출발하여 연(輦)을 타고 제릉으로 가면서 시신(侍臣)들을 보고 이르기를
‘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명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물으니 주서(注書) 이회원(李會元)이 아뢰기를
‘태종께서 과거를 설행(設行)하였는데, 본도(本都, 개성)의 대족(大族) 50여 가문이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그 동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사에 ‘부조현(不朝峴)’과 ‘두문동(杜門洞)’이란 말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부조현’이란 태종이 과거를 설행하였는데, 고려의 유신들이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부조현’이란 의미는 ‘신왕조인 조선의 왕에게 조회를 하지 아니하고[不朝]) 넘어간 고개[峴]’라는 의미로
즉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또 ‘두문동’이란 말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였으므로[杜門不出] 그 동리를 두문동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영조는 부조현 앞에 이르러 교자(轎子)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지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한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후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보는 것과 같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승지에게 명하여 칠언시(七言詩) 한 구를 쓰게 하니
‘승국충신면게세勝國忠臣勉繼世(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라 하였다.
그리고 어가(御駕)를 따르던 옥당(玉堂)과 승지․사관으로 하여금 시를 이어서 지어 올리게 하였으며,
또 친히 ‘부조현不朝峴’ 세 글자를 써서 그 유허지(遺墟地)에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영조 27년(1751, 신미)에는 개성 유수(留守) 서종급(徐宗伋)의 장계(狀聞)를 받고 두문동 72인의 충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고)또 어필(御筆)로서 “승국충신금언재 특수기동표기절(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
고려의 충신이여 지금 어디에 있는가? 특별히 그 동리에 비석을 세워 그 절의를 표하노라.)”
이라는 14자를 써서 내리고 비석을 세울 것을 명하였으며 그 제문(祭文)은 다음과 같았다.
『유(維)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124년 신미(辛未) 10월 21일에 조선 국왕은 신하 개성부 유수 서종급을 보내어
두문동 중에서 고려의 여러 충신들의 영령에게 치제(致祭)하노라.
절의를 지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은 신하의 떳떳한 도리(道理)요 충신 열사를 표창(表彰)한 것은 에장(禮章)에 나타나 있도다.
우리 조선이 천명을 받아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에 순응하여 임금의 성화(聖化)가 온 세상에 미치니 모든 사람이 신하가 되었건만,
오직 고려의 사람 72인은 망국의 신하로 자처하고 스스로 그 뜻을 깨끗하게 하였도다.
그들이 들어간 동리가 있으니 어찌 문에 빗장을 걸어 닫고 나오지 아니하고 형적(形跡)을 숨겼는가.
비록 몸은 죽었으나 그 절의는 사라지지 아니하였나니 충절을 지켜 죽음에 이름에도 후회함이 없었도다.
뒤에는 부조현(不朝峴)이 있고 앞에는 괘관현(掛冠峴)이 있도다. 이름은 비록 다르나 그 뜻을 취함은 같으니
오직 조(曺)와 임(林)과 맹성(孟姓) 세 사람만이 이름이 전하고 나머지는 기록이 되지 못하였도다.
내가 옛날에 이 곳을 지나가다가 유지(遺址)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지난날을 생각하니 감회를 그칠 수가 없구나.
사적이 점점 오래되고 문헌이 없어져 후세에 권장을 하려해도 표석이 없으므로
특별히 큰 글자 14자를 비석에 세겨 나의 뜻을 나타내었노라.
남긴 충렬을 생각하여 후손을 찾아내어, 방위를 정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깨끗하게 제수를 장만하여 제사를 드리노라.
백세(百世)가 어찌 멀다고 하겠는가? 길이 풍성(風聲)을 세우리라.』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조는 부조현과 두문동에 비석을 세우고 두문동 72현에 치제(致祭)를 하는 등
두문동 72현의 절의를 그들의 신하들에게 본받게 하여 자신의 시대를 치세(治世)로 만드려는 강한 의지를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지금까지 금령(禁令)으로 되어 있던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구본욱(具本旭,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과 송은(松隱) 구홍(具鴻)의 절의 정신(節義精神) 참조>> (1) 우현보(禹玄寶)-단양인(丹陽人), 호 양호당(養浩堂)
(2) 조의생(曹義生)-창녕인(昌寧人), 호 원촌(遠村)
(3) 임선미(林先味)-평택인(平澤人). 호 휴암(休庵)
(4) 고천상(高天祥)
(5) 전귀생(田貴生)-위 두 사람은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살았음
(6) 이숭인(李崇仁)-성주인(星州人), 자는 자안(子安), 호 도은(陶隱), 정몽주가 상해된 후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의 심복에게 배소에서 살해됨
(7) 이맹예(李孟藝)-오천(鰲川)에 숨어 살았음
(8) 유순(柳洵)-오봉산(五鳳山)에 숨어 살았음
(9) 전조생(田祖生)-호 뢰은(耒隱)-두류산(頭流山) 배록동(排祿洞)에 숨어 살았음
(10) 조승숙(趙承肅)-호 덕곡(德谷), 고향 덕곡으로 돌아감
(11) 채귀하(蔡貴河)-다의현(多義峴)에 숨어 살았음
(12) 서보(徐輔)-적암(積岩)에 숨어 살았음
(13) 변숙(邊肅)
(14) 박심(朴諶)
(15) 신안(申晏)-호 황의옹(黃衣翁), 황의산(黃衣山)으로 돌아감
(16) 박녕(朴寧)
(17) 김충한(金冲漢)-호 수은(樹隱), 두류산(頭流山)에 숨어 살았음
(18) 고천우(高天祐)-두류산(頭流山)에 숨어 살았음
(19) 서중보(徐仲輔)- 두류산(頭流山)에 숨어 살았음
(20) 조안경(趙安卿)
(21) 이색(李穡)-한산인(韓山人), 호 목은(牧隱), 판문하부사(判門下部事), 조선 건국 후 이성계 일파에게 몰려 유배 생활을 하던 끝에 죽음
(22) 이유(李裕)-오천(鰲川)에 숨어 살았음
(23) 조견(趙狷)-송산(松山)에 숨어 살았음
(24) 허금(許錦)-자 존중(存中), 호 야은(埜隱), 전리시판서(典理寺判書),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살았음,
(25) 이수인(李守仁)-원지(遠地)로 유배(流配)되었음
(26) 정희(鄭熙)-원지(遠地)로 유배(流配)되었음
(27) 길재(吉再)-해평인(海平人), 자 재보(再父), 호 야은(호 冶隱), 고려 멸망 후 고향 선산(善山)에서 후진 교육에만 힘씀
(28) 원천석(元天錫)-원주인(原州人), 자 자정(子正), 호 운곡(耘谷), 일찍이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 바 있었으므로
여러번 불렀으나 고려 멸망 후 치악(雉岳산)에 은거함
(29) 김주(金澍)-호 농암(籠岩), 중국(中國)으로 들어감
(30) 최양(崔瀁)-호 만육당(晩六堂), 중대산(中臺山)에 숨어 살았음, 정포은(鄭圃隱)의 생질(甥姪)
(31) 전오륜(全五倫)-서운산(瑞雲山)에 숨어 살았음
(32) 조홍(趙洪)-율원산(栗原山)에 숨어 살았음
(33) 김자수(金自粹)-호 상촌(桑村 ), 추령(秋嶺)에 숨어 살았음
(34) 이사경(李思敬)-숙신리(肅薪里)에 숨어 살았음
(35) 이수생(李遂生)-율리(栗里)에 숨어 살았음
(36) 김약시(金若時)-광산인(光山人), 호 음촌(陰村), 직제학(直提學), 조선 태조가 여러번 불렀으나 절의를 지킴, 금광리(金光里)에 숨어 살았음
(37) 남을진(南乙珍)-의령인(宜寧人),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사천(沙川)에 숨어 살다가 조선 태조가 부르자 더욱 깊숙이
감악산(紺岳山)에 숨어 살았음
(38) 이행(李行)-여흥인(驪興人), 자 주도(周道), 호 기우자(騎牛子), 백암(白巖 ), 일가도인(一可道人), 대제학(大提學),
고려가 망하자 예천동(醴川洞)에 숨어 살았음, 나중에 태종(太宗)에게 발탁되어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냄
(39) 이륜(李淪)-도탄(桃灘)에 숨어 살았음
(40) 이양중(李養中)-광주인(廣州人), 자 자정(子精), 호 석탄(石灘), 형조참의(刑曹參議), 고려가 망한 후 절의를 지키다가
태종 즉위 후 불렀으나 끝내 절의를 지킴
(41) 서견(徐甄)-이천인(利川人), 호 여와(麗窩), 정몽주 살해 후 정도전 등에 의해 장류(杖流)되었다가 풀려나
조선 개국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나 금천(衿川)에 숨어 살면서 절의를 지킴
(42) 임탁(林卓)-금성(錦城)에 숨어 살았음
(43) 김육비(金六庇)-고석산(古石山)에 숨어 살았음
(44) 변귀수(邊貴壽)-두류산(頭流山) 배록동(排祿洞)에 숨어 살았음
(45) 안종약(安從約)-위와 같음
(46) 김준(金俊)-위와 같음
(47) 윤육(尹陸)-위와 같음
(48) 박침(朴忱)-위와 같음
(49) 배상지(裴尙志)-호 백죽(柏竹), 위와 같음
(50) 구홍(具鴻)-능성인(綾城人), 호 송은(松隱), 좌시중(左侍中), 위와 같음
(51) 이유인(李唯仁)-위와 같음
(52) 박문수(朴門壽)-위와 같음
(53) 이석지(李釋之)-영천인(永川人), 호 남곡(南谷), 용인(龍仁)에 숨어 살았음
(54) 성사제(成思齊)-두문동(杜門洞)에 숨어 살았음
(55) 민보(閔普)-위와 같음
(56) 임척(林隲)-위와 같음
(57) 차원조(車元覜)-위와 같음
(58) 최문한(崔文漢)-강릉인(江陵人), 호 충재(忠齋), 충숙왕 부마(忠肅王駙馬), 강릉(江陵)에 숨어 살았음
(59) 신석(申釋)-무인(武人), 병부랑(兵部郞), 두문동에 숨어 살았음
(60) 신자악(申自嶽)-위 ‘신석’의 아우(弟), 영해(寧海)에 숨어 살았음
(61) 김위(金瑋)-두류산(頭流山)에 숨어 살았음
(62) 민안부(閔安富)-위와 같음
(63) 신덕린(申德隣)-위와 같음
(64) 신포시(申包翅)-위와 같음
(65) 박의중(朴宜中)-밀양인(密陽人), 자 자허(子虛), 호 정재(貞齋), 대사성(大司成), 농사를 짓고자 돌아감,
뒤에 고려사 수찬에 참여하고 조선조의 검교참찬의정주사(檢校參贊議政府事)가 되었음
(66) 이양소(李陽昭)-순천인(順天人), 자 여건(汝健), 호 금은(琴隱), 군수(郡守), 조선 태조, 태종이 여러번 불렀으나 묘정(墓庭)으로 돌아감
(67) 박태시(朴太始)-호 송계(松溪), 고향으로 돌아감
(68) 이경(李瓊)-호 이우당(二憂堂), 두문동(杜門洞)에 숨어 살았음
(69) 맹호성(孟好性)-호 용호(龍湖). 위와 같음
(70) 길인적(吉仁迪)-위와 같음
(71) 신이(申彛)-호 신귀재(愼歸齋), 판도판서(版圖判書), 위와 같음
(72) 반모(潘某)-실명(失名) 위와 같음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 등에 두문동 제현 및 기타 2인을 다음과 같이 열록(列錄) 하였음. 정몽주(鄭夢周), 김주(金澍), 이존오(李存吾), 정추(鄭樞), 최양(崔瀁), 길재(吉再), 남을진(南乙珍),
임선미(林先味), 원천석(元天錫), 조의생(曺義生), 맹유(孟裕_, 도동명(陶東明), 도응(都膺), 이사지(李思之),
김자수(金自粹), 장안세(張安世), 국(鞠), 정광(程廣), 한철충(韓哲沖), 나천서(羅天瑞), 조(趙), 김약시(金若時)
정온(鄭溫), 맹희도(孟希道), 신덕(申德), 서견(徐甄), 최문한(崔文漢), 허징(許徵), 조승숙(趙承肅), 이사경(李思敬),
성부(成溥), 이명성(李明誠), 이색(李穡), 정지(鄭地), 하자종(河自宗), 이양중(李養中), 김진양(金震陽), 안성(安省),
김약항(金若恒), 배상지(裵尙志), 이석지(李釋之), 이행(李行), 변숙(邊肅), 김선치(金先致), 이왕택(李涓), 이종학(李種學),
이양소(李陽昭), 민유(閔愉), 문익점(文益漸), 임탁(林卓), 조희직(曺希直), 송인(宋寅), 곽추(郭樞), 조철(趙鐵),
김사렴(金士廉), 윤충보(尹忠輔), 유(柳), 채왕택(蔡王澤), 송교(宋皎), 최칠석(崔七夕), 차원(車原) , 김자진(金子進 혹은 金自進),
김승길(金承吉), 범세동(范世東), 성사재(成思齊),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忠漢), 구홍(具鴻),
채귀하(蔡貴河), 조유(趙瑜), 김제(金濟), 전조생(田祖生), 전귀생(田貴生).】
일로당(逸老堂) 양 관(梁 灌)
조선초기 세종 19년~중종 9년 때의 무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내외의 벼슬을 역임하고
지돈령부사를 지낸 청백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심지어 군졸과 침식을 같이할 정도였다 합니다.
장흥부사를 사임하고 돌아올때 그의 소지품은 소학과 이백, 두보의 시집, 그리고 가야금과 피리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마침 동행을 했던 어사가 성종에게 고하고 성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청백리에 기록하였다 합니다.
말년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일로당이란 정사를 짓고 꽃과 대나무를 벗하여 살았다고 합니다.
일두 정여창(鄭汝昌)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었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이다.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理氣論)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功利)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立志)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다.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정여창 역시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10)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나주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개암(介庵) 강 익(姜 翼)
【강익(姜翼, 1523∼1567)의 자는 중보(仲輔)이고 호는 개암(介庵) 또는 송암(松庵)이라고도 하며,
본관은 진양(晋陽)으로 안의(安義)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3년(중종 18년)에 아버지 승사랑(承仕郞) 근우(謹友)와 어머니 남원 양씨 사이에서 함양 효우촌(孝友村)에서 태어났다.
강익은 20세(1542년)에 남명선생의 학문과 인격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으나 부친의 병환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후학을 지도함에 있어 신독(愼獨)을 권장하여 말보다는 실천위주의 학문을 하도록 하였다.
32세(1554년)에는 남명선생을 찾아가 공부하였다. 남명선생이 강익을 데리고 학문을 의논하다가
학자들이 끝까지 성공하는 이가 드물었다는 말을 하면서 이르기를, 것진정코 서로 믿어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은 오직 자네[강익] 뿐(『南冥集』, 「編年」 54歲條)겄이라고 칭찬하였다.
수학 및 교육 : 강익은 15세(1537년)에 함양의 당곡(唐谷, 鄭希輔)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당시 당곡선생의 문하에는 노진, 양희를 비롯하여 어진 선비들이 많이 모였는데, 강익은 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학문을 강마하였다.
과거 및 벼슬 : 강익은 27세(1549년)에 향시(鄕試: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이후 과거에 한두 번 응시하고는 다시는 뜻을 두지 않았으며, 오로지 독서에 힘썼다.
45세(1567년)에 오건이 학행으로 추천하여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사람은 친일논란이 있어 설명을 넣지 않습니다.
그런줄 알았다면 사진도 빼려 했으나 바로 맞은편에 의병장 문태서장군의 흉상이 있어서 상징적으로 올렸습니다.
친일파와 의병장의 흉상이 마주보고 있는 현실을 무어라 해석 한단 말입니까?
공원을 둘러보는 분들도 과연 위와 같은 아이러니를 알고 있을까요...
여기는 함양 상림공원 안에 자리한 역사인물공원입니다.
보기드문 비각의 모습입니다. 비석이 있고 네개의 돌기둥으로 받친 돌로만든 비각이 있습니다.
이 비와 비각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바로 밀양 박씨 열녀의 정려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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