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가볼만한 곳, 보은의 볼거리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2】

2011. 8. 24. 08:42여행지/충청북도

수운대신사 최제우와 해월신사 최시형의 초상이 돌에 프린팅 되어 있습니다.

최제우
동학(東學)의 창시자.
내용
본관 경주(慶州). 호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초명 복술(福述)·제선(濟宣).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공부하여 학문에 정진하다가 1844년(헌종 10)

구도행각에 나선 지 10년 만에 울산(蔚山) 유곡(裕谷)에 은거, 수도에 들어갔다.

1856년(철종 7)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간 기도하고,

1857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했으며, 1859년 다시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한 끝에,

그리스도교적 영향과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천(天)·인(人)을 대도(大道)의 근원으로, 성(誠)·경(敬)·신(信)을 도행(道行)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여 도를 천도(天道)라 하고,

농민·천민·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전파했다.

1862년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학론(東學論)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4곳에 이르렀다.
같은 해 최시형(崔時亨)을 북접(北接) 대도주로 앉히고 8월에 도통(道統)을 계승하여 교주로 삼았다.

1864년(고종 1) 각 접소를 순회하다가 용담정에서 동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3월에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순도하였다.

1907년(융희 1) 신원되었다. 저서에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 등이 있다
최시형
조선 후기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敎主).
내용
본관 경주(慶州). 호 해월(海月). 초명 경상(慶翔). 경주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한때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했다.
1861년(철종 12) 동학에 입문, 1863년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되었다.

64년(고종 1)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山)에 은신,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 ·울진(蔚珍) 등지에서 포교에 힘썼다.

1871년 허락도 없이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탄압이 강화되자 소백산(小白山)에 피신했다.
그 후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주요 경전(經典)을 발간, 교의(敎義)를 체계화했으며,

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탄압이 완화되자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

조직을 강화했다. 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교조의 신원,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관찰사에게 요구했다.
18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으고 그 소두(疏頭)로서 박광호(朴光浩)를 내세워 왕에게 직접 상소,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의 선처를 약속받고 해산했으나 시행되지 않자,

다시 보은(報恩)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을 시켜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 우선 경상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북접(北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전봉준이 일본군 상륙과 정부의 요구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재기포(再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했다.

관군 ·일본군의 혼성군과의 공주(公州)싸움에서 참패하고 또 장수(長水) 등지에서 연패하여 피신했다가

98년 원주(原州)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 (네이트 지식)

 

 

 두분의 초상이 걸린 성벽.

 

 

동학사상을 말해주는 인내천정의 모습입니다.

 

 

도종환 시인의 '종곡리에서'라는 시의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세개의 기둥...

 

 

동학농민혁명의 주요연표를 만들어 놓았더군요.

 

 

주요연표.

 

 

혁명당시 사용되던 주술적 영부(靈符)라고 합니다.

 

 

동학혁명군 12개조 폐개정안.

지금도 고쳐지지 않는 일들입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눈에 띄는 부분들은, 탐관오리의 엄징, 횡포한 부호의 엄징,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징벌,

무명의 잡세 폐지, 관리채용의 지벌타파와 인재등용, 왜와 통하는 자의 엄징......

요즘 말로 하면 부패 고위관리의 처벌(공수처 신설, 검찰개혁), 재벌에 대한 엄정한 법적용(재벌개혁),

학계, 문화계 등 부패자 척결, 세제개혁, 똥돼지 금지(학연, 지연, 혈연 타파),

친일파 척결 등...... 읽어 내려가는 동안 가슴속에서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더운날 뚜껑 열릴뻔 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지 116년 바뀐것이 무어란 말입니까?

결국 나라를 빼았기고 억압의 세월을 보냈고 분단된 땅에서 무려 50년의 독재를 보내버린...

역사의 가정은 없지만 만일 동학혁명이 일정부분 성공했더라면 우린 지금 어떠한 나라에 살고 있을까요?

 

 

  동학의 덕목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인간의 소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읽어가는 내내 100여년 전의 사상이 다시금 아로새겨집니다.

 

 

동학혁명군 추모가 입니다.  "세상을 위해 목숨 바친 거룩한 님이여... 우리의 앞날을 열어주소서..."

 

 

용담유사에 나오는 교훈가를 새겨 놓았습니다.

 

 

운명(殞命 :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이라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유시입니다.

한겨레신문 기사를 하나 빌려 왔습니다.

역사학자 이이화님의 글입니다. 

【1990년 초부터 94년에 걸쳐 진행한 동학농민전쟁 백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백추위)의 현장답사를 통해

우리는 농민군의 형상이 투영된 여러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후대 민중의 의식도 읽어낼 수 있었다.

공주 우금치에 세워진 동학혁명군 위령탑에는 박정희의 글씨와 이선근의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훗날 누군가 ‘박정희 대통령의 뜻으로 세웠다’는 글씨를 돌로 찍어내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또 정읍 황토현전적지의 건립 과정을 설명하는 글에 ‘전두환 대통령의 뜻에 따라 건립했다’는

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의 설명문에서 ‘전두환’ 글자를 돌로 찍어내 놓았다.

이런 모습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민주·민중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생각했다.

또 장흥에서는 100돌을 앞두고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을 세우고 비문은 고은 시인이 지었는데

반농민군 세력 후손들의 반발과 방해로 제막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장성 신호리의 황룡강 언저리에는 1984년 5월 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무찌르고

전주로 진격하는 계기가 된 황룡전투 때 관군 대장으로 전사한 ‘이학승 순의비’(1897년)가 세워져 있었다.

이후 100돌을 맞아 1994년 12월 이상식 교수(전남대)의 주도로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이곳에 동학농민군 승전 기념탑을 세웠다.

이어 97년에는 동학혁명 승전기념공원으로 조성됐고 ‘황룡 전적비’는 국가사적지 제406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곽재구의 시 ‘조선의 눈동자’가 새겨진 화살 모양의 웅장한 기념탑과 달리,

‘의병대장’ 면암 최익현 선생이 비문을 썼다는 순의비는 들판 언덕 아래 수풀 속에 초라하게 서 있었다.

정읍 조소리에 복원한 전봉준 고택을 찾아갔을 때는 길목에서부터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도로 안내판에 ‘생가길’이라고만 쓰여 있더니, 고택 안내판에는 ‘봉준은 양반으로…’ 따위의 구절들이 보였다.

더군다나 초가삼간이어야 할 고택은 옆집 한 채까지 헐어 널찍하게 정원처럼 꾸며두었고,

담은 흔히 가난한 농가에서 보이는 싸리울타리가 아니라 지주·부자들의 집에서 만들었던 두꺼운 흙담으로 둘러놓았다.

또 하학리 황토현 전적지 전시관에 갔을 적에는 전봉준 동상에 ‘전봉준 선생상’이라 쓰여 있었다.

우리는 ‘장군’이 아니라 ‘선생’이란 표현에 고개를 흔들었다.

민중은 그를 장군이라 불렀는데 굳이 선생이라고 고쳐야 하는가?

전봉준의 강렬한 ‘이미지’를 묽게 흐리려는 호칭일 것이다.

전시실 안의 전시물들은 한층 가관이었다.

교수형을 당한 전봉준을 두고 칼로 머리를 잘라 막대기에 달아 조리를 돌린 사진을 걸어두고 있었다.

또 제민당이란 간판을 단 곳에는 유명 화가에게 사례를 듬뿍 하고 그렸다는 전봉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거기에 전봉준이 정자관을 쓰고 도포에 술을 길게 늘어뜨린 선비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시대상에 맞지 않는 농기구들도 벌여놓고 있었다.

 

 
» 역사학자 이이화
 
한편 우리 연구자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도 많았다.
예천에서는 농민군들이 민보군 5명을 한내의 모래밭에 생매장한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하동의 고성산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는 지금도 한 마을 수십 집에서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또 이곳 약수사의 주지인 국포 스님은 일본군이 산에 불을 질러 농민군 수십명이 약천암의 굴속에서 죽었다고 말했으며 주민들은 산마루에 농민군 지휘소가 있었다고 전해주었다. 실제로 이곳을 찾아보니 약수암은 동굴처럼 생겼고 산마루에는 탁자처럼 생긴 바위 옆에 의자처럼 생긴 돌이댓개쯤 놓여 있었다.】

이런 왜곡은 일본애들만 하는줄 아셨다면 오산입니다.   제대로된 역사의식과 철학의 부재는 아무리 문명의 발전과 물질의 풍요하다 해도,   모래위에 성을 쌓아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와 결과를 굳이 필설로 할 필요가 없겠지요.

 

 

새야새야 파랑새야의 노래비도 서있습니다.

 

 

용담가가 새겨진 시비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성지 보은...

 

 

선조들의 위대한 동학사상을 마음깊이 아로새기면서 공원을 떠납니다.

100년의 시공을 건너 그 숭고하고 인간적인 뜻이 그 당시 세워졌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더불어 그 훌륭한 사상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못난 후손으로 부끄러움을 떨치기 힘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