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16. 08:42ㆍ여행지/경상북도
박물관의 안쪽 모습입니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그대로 재현한 모탑이 마당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자공작문석(獅子孔雀文石), 사지와 공작이 새겨진 돌 이라고 하네요. 그 중 사자가 새겨진 돌의 모습입니다.
이건 공작의 무늬가 들어간 문석입니다.
이것을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알려지거나 문헌에 남아있지는 않다고 합니다.
다만 서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그쪽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것이 아닌가 한다고 하네요.
불법의 수호자 사천왕상입니다.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통과해야 하는 문이 바로 사천왕이 지키는 천왕문이라고 합니다.
사천왕 이외에도 팔부중과 금강역사, 십이지신이 있다고 합니다.
사천왕은 원래 고대인도의 귀신들의 우두머리 였는데 불교에 귀의 하여 불법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수미산 중턱에 동서남북으로 자리 하고 있으며 동쪽엔 지국천왕(持國天王), 동쪽엔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엔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엔 다문천왕(多門天王)이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사천왕의 모습과 무기는 다르답니다. 하지만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항상 탑을 들고 있다고 하네요.
그 아래로 있는 팔부중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팔부중은 불타팔부중으로 천(天), 용(龍), 야차(夜叉), 건달바,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喉羅迦)라고 합니다.
야차(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고있는 귀신), 아수라(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 가루라(금시조로 불리우는 전설상의 큰새).
긴나라(아름답고 묘한 목소리를 지닌 하늘의 악신), 마후라가(몸은 사람인데 머리는 뱀인 신),
건달바(어린아이를 보호하는 신) 참으로 오묘함이 깃들어있는 사대천왕과 팔부중(八部衆)이 아닐수 없습니다.
다른쪽에서 바라본 석가탑과 다보탑.
이 석등은 진품입니다. 아쉽게도 지붕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박물관 오른쪽을 따라가면 끝쪽에 이런 석조 유물들이 엄청 많이 놓여있습니다.
역사의 굴레에서 흘러나와 제자리를 찾지못한 흔적들이 이곳 박물관 잔디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기단석 역시 이곳을 휴식처 삼아 제자리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긴세월을 비교적 온전히 버텨온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저 위에 있던 많은 역사들은 어디로 간것인지...
때로는 중간과 기초가 사라진 모습으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어쩌면 문화재의 공동묘지는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어갑니다.
이 유물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날이 반드시 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온전한 모습을 본다는것이 오히려 어색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하나를 갖추지 못한 모습...
역사의 퍼즐속에 들어와 있다는 기분...
어찌 풀어야 할지 모르고 그저 그냥 서성대는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인것 같습니다.
역사의 회랑을 지나온 끝자리 즈음에 고선사터 삼층석탑이 반겨줍니다.
고선사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대사가 계시던 사찰이라고 합니다.
최소한 1,325년 이상이 된 이 석탑은 높이가 10.1m에 이르는 커다란 탑입니다.
석탑을 쌓은 이유를 설명한 글이 있더군요.
석탑은 석조탑파(石造塔婆)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탑파는 인도 말인 수투파(STUPA)를 한자로 옮긴 말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묻은 무덤을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중국의 흙탑(전탑), 일본의 목탑이 언급이 되더군요.
처음엔 목탑을 많이 만들었지만 화재와 벼락에 약해 소실과 파손이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목탑을 만들었지만 위의 연유로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돌로 탑을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초기의 석탑은 목탑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흔적이 최초의 석탑으로 추정되는 미륵사지 석탑에서 그 모습을 엿볼수 있다고 합니다.
여하튼 높이가 80여미터로 추정되는 황룡사지 구층목탑도 몽골군에 의해 소실될때까지
삼국유사에 따르면 다섯번을 벼락을 맞고 여섯번을 고쳤다고 합니다.
수도승의 모습처럼 보이는 석상이 있습니다.
한쪽으로 목이 없는 석불상들이 길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석불의 목이 사라진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황사를 발굴할 때 우물에서 목이 없는 석불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가장 큰 원인은 지진같은 자연재해이고 그 다음이 침략에의한 파괴라고 합니다.
지진 등의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받침대위의 불상이 아래로 떨어지는데 , 이때 가장 약한부분인 목이 부러지기 쉽다고 합니다.
또한 배불숭유(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앙함)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는 일부러 불상을 훼손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간혹 땀을 흘리는 불상 등 이적이 일어나는 불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유생들이 혹세무민한다 하여 목불은 불을 태웠고, 석불이나 금동불은 우물, 저수지, 바다 등에
던저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불상의 머리를 잘라 관청에 신고 햇다고 합니다.
분황사 우물에서는 머리보다 몸체가 더 발견 되었다고 하는군요.그만큼 많은 수난을 겪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요즘도 단군상이나 불상을 훼손하는 특정종교인들이 있지요...
자기가 소중하면 다른이도 소중하다는 평범함이 종교적 진리임도 모르는 파렴치한(漢) 이라 하겠습니다.
광배를 갖춘 석불의 모습에서 온화한 미소가 느껴집니다.
목이 훼손된 많은 석불들, 이 석불들이 전부 분황사 우물에서 나왔다고 하네요.
세월의 무게속에 변해버린 사자상, 처음볼 때는 원숭이로 보이기도 하더군요.
우람하고 무서운 표정의 금강역사상입니다.
구황동 절터에서 가지고온 금강역사라고 합니다.
아직도 이 절터엔 금강역사를 포함한 유물들이 있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석등 중 가장 커다란 석등입니다.
높이가 무려 6m에 이른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기증받아 복원을 하였지만 기증자인 최대식선생도 그 출처를 모르기에
어디에 놓여있던 석등인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답니다.
궁굼한것은 불을 밝히는 곳이 높이 5m 위치에 있다는 거지요 매번 사다리를 놓고 불을 밝혔을까요?
남원 실상사에 가면 석등 앞에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 답을 찾은거지요.
천광운영(天光雲影) 네글자가 새겨진 석수조입니다.
글 그대로 하늘빛과 구름그림자이니 이 석조에 멋진 하늘이 투영되었다는걸 알 수 있네요...
그 멋진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박물관 입구의 자그마한 동산, 그곳엔 소나무와 어울어진 석탑이 천년고도의 고즈녁함을 말해주며 서있습니다.
뒤늦게 아내가 찍어온 불국사 극락전 앞의 복돼지상을 올려봅니다. 쓰다듬으면 복받는다고 엄청 쓰다듬는 다고 합니다.
박물관 실내 전시실에서 아내가 담아온 황룡사의 모습입니다.
이 조감도와 모형과 같이 그대로 다른지역에 복원을 한다면... 엄청나리란 생각을 해봅니다.
보슬비가 내린다 싶더니 점점 빗줄기가 굵어집니다.
더이상 박물관에 머물기 어려워집니다. 견학온 학생들, 외국인 관광객들 엄청많이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경주시내를 떠나기로 하고 길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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