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의 도시, 경주의 가볼만한 곳 -21】

2011. 8. 11. 10:06여행지/경상북도

이번에 가는곳은 첨성대입니다.

교통이 복잡해서 관광버스를 도로에 정차하고 걸어서 첨성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길가엔 개량종 무궁화가 한창 피어있습니다.

 

 

경주 세계문화엑스포를 기념하는 에드벌룬이 고분위에 떠있습니다.

 

 

멀리 멋있는 한옥이 보입니다.

 

 

넓다란 잔디, 그리도 고분, 아마 이 잔디밭도 파헤치면 어떤 유물이 출토될지 모릅니다.

 

 

자세히 보니 경주이씨 관란종친회의 한옥입니다.

 

 

드디어 동양 최고의 천문관측대인 첨성대의 모습이 보입니다.

 

 

브리테니커에서 첨성대를 이렇게 마설명하고 있습니다.

【국보 제31호. 높이 약 950㎝.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천문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첨성대의 구조는 기단부(基壇部)·원주부(圓柱部)·정자형두부(井字形頭部)로 나누어진다.

 기단부는 사각형 모양으로 상하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상단은 한 변이 518㎝, 높이 39.5㎝인

 직육면체 석재 12개로 이루어져 있다.

 하단은 이보다 약간 큰 한 변이 536㎝, 높이가 39.5㎝인 직육면체 석재 20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단의 방향은 남쪽 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 돌아가 있다.

 원주부는 총 27단으로 높이는 805㎝에 이르며 술병 모양을 하고 있다.

 제일 아랫단의 둘레는 1,600㎝, 14번째 단의 둘레는 1,170㎝, 제일 윗단의 둘레는 920㎝이다.

 아래부터 제12단까지는 각 단의 높이가 약 30㎝이다.

 중앙의 출입구는 제13~15단에 걸쳐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약 95㎝이다.

 출입구의 방향은 정남쪽에서 동쪽으로 16° 돌아가 있다.

 출입구 아랫변의 돌은 커다란 평판석(平板石)으로 되어 있으며 13단 이상은 내부가 비어 있다.

 그리고 평판석에는 사다리를 걸쳤다고 생각되는 홈이 출입구 양 끝에 파져 있다.

 13~27단까지 비어 있으므로 관측자가 사다리를 설치하고 아래위로 오르내렸을 것이다.

 정자형의 두부는 상하 2단의 정자형 구조로 각 단은 306×32×32㎝ 크기의 석재를 4개씩 정자형으로 물려놓았다.

 정자석의 내부에 220×64㎝의 공간이 확보되므로 하부에 나무판을 깔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첨성대 전체의 석재는 화강암으로 총석재수는 365개 내외이고, 기단부, 원주부의 외벽과 정자형 두부는

 다듬어져 있으나 내벽은 잘 다듬어져 있지 않다.】

 

 

선덕여왕 15년(646년)에 완공된것으로 여겨지는 첨성대는

원래의 알고있던 천무관측대가 아니라 불교의 수미산을 상징하는 상징탑이라고 하는 학설도 재기되었습니다.

주로 제를 올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라는 거지요.

 

 

하지만 여전히 논란은 있지만, 경주에 있는 유물중 유일하게 사람의 손을 타지않고

만들어진 그대로를 유지하는 경주 유일의 신라유물입니다.

전쟁을 겪으며, 세월이 흐르며 지반이 약해져서 기울어진 모습만 유일한 변화라고 합니다.

 

 

간밤에 봤을땐 고분이 2개인줄 알았더니... 나무옆에 있는 고분 아래로 3기의 고분이 더 보입니다.

 

 

뒷쪽으로 보이는 월성과 계림.

이곳엔 관연 무었이있었는지...... 아직 남아있는 기초석이 반듯한 건물이 있던 자리라는걸 보여줍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동행한 관광객들의 모습입니다.

 

 

첨성대를 구경하고, 안압지로 불리워지는 월지(月池)에 왔습니다.

 

 

임해전이 속해있어 임해전지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바닥에 돌을 깔아 물에 수초가 생기는것을 방지 했다고 합니다.

강에서 물을 끌어와 조성한 인공연못입니다.

 

 

5개의 건물터 중 3개소만 복원을 하였다고 하는군요.

 

 

총 26개의 건물 및 회랑터가 있었다고 하니 상당한 규모입니다.

이 중 임해전은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유리상자 안에는 월정교의 복원모습을 만들어놓은 미니어쳐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폐허가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雁鴨池)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야경이 빼어난 전각. 어제의 아쉬움을 달래며 낮의 모습을 담아봅니다.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에서 신라시대 축조된 안압지의 모습을 다 확인하였고,

임해전터에서는 보상화문전이 발견되 이 기와에 새겨진 제작년대를 보고 축조연대 또한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14면 주사위도 나왔는데, 놀이기두로 그 면엔 '술 석잔 한번에 마시기', '술 마시다 크게 웃기', 등

재미난 벌칙이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름은 주령구라는 목제품인데 지금은 진품은 존재하질 않는다고 합니다.

 

 

 과거의 영욕이 함께 머물러있는 이곳에서 만감이 교차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마지막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간지도...

 

 

강에서 끌어온 물을 이곳에 넣기 위해 정화장치를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수조유구(水槽遺構)라는 것입니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 수조는 연못으로 물이 들어가는 곳에 만들어놓았습니다.

두 수조의 높이를 40cm의 차이를 두어서 위에서 유입된 물이 한쪽을 거치면서 맑은물이 되어서

연못으로 흘러들어 가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젠 경주시내 일원에 있는 주요유적지의 관광을 마무리 했습니다.

이젠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시내와 떨어진 석굴암과 불국사를 돌아보면

경주씨티투어의 막이 내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