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가볼만한 곳, 차이나타운-2】

2011. 3. 14. 11:05여행지/인천

이른시간에 도착해서 그런지 한산해서 좋습니다.  벽에그려진 대나무와 홍매화도 천천히 감상하며 언덕길을 오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짜장면 만들었다는 유서깊은 '공화춘'이 보입니다.

1883년

인천의 개항과 더불어 형성된 청나라 조계지에는 청나라 관원, 상인, 노동자들이 넘쳤다.

그리고 이들을 상대로 한 숙박업과 요식업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1905년

22세의 청나라 청년인 우희광이 청나라 조계지에 음식점과 호텔을 겸업하는

'산동회관(山東會館)'의 문을 연다.

그리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1912년 2월 청나라 황제 선통제가 폐위되고,

'중화민국'이 건립되는데, 우희광은 이를 기념하여 산동회관을 공화춘으로 개명하는데

'공화춘'은 공화국 원년(元年, 1912년)의 봄(春)이라는 뜻 이었다. (위키백과)

 

 

벽에 '평안부귀(平安富貴)'의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송(宋)이란 음식점 벽에 한시가 적혀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엄청 맛있는 요리를 하고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편편육향이니, 천하희환 유향만세, 천하의 기쁨과 환희를 담은 향이 만세에 머문다니~~^^*

진정 장풍나가는 소리입니다.

 

이정표가 있습니다.

의선당, 삼국지 벽화거리, 근대건축 전시관,

우선 가까운 의선당쪽으로 걸음을 옮겨보기로 합니다.

 

식당앞에 서있는 포대화상의 모습이 정겹게 보입니다.

포대화상(布袋和尙)은 중국 후량(後梁) 사람으로 법명은 계차(契此)이다.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이었다.

또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녔는데, 그 자루 속에는 별별 것이 다 들어있어서

무엇이든 중생이 원하는 대로 다 내어주어서 포대스님이라고 불렸다.

기이한 행적을 수없이 남겼으며 사람들의 길흉화복이나 날씨 등을 예언하여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천백억으로 몸을 나누어도 낱낱이 참 미륵일세.

항상 세인에게 나뉘어 보이건만 아무도 미륵임을 아는 이 없네” 라는

게송을 남기고 반석 위에 단정히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대화상이 미륵 보살의 화현(化現)임을 알아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드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중국에는 포대화상이 재물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이 있는데 아마도 포대를 메고 다녔던

그의 행적 때문인 듯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현대에 들어 포대화상에 대한 신앙과 함께 기복적인 이유에 의해

포대화상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이 많이 제작되고 있는데 중국적인 영향이다.

조선시대 작품으로 몇 점의 포대화상도가 전하는데 본래 선종화의 하나로 그려졌던 것이며

현대에 만들어지는 중국적인 포대화상과는 차이가 있다. (다음백과)

 

이쪽은 거리가 썰렁합니다.

 

 

그래도 차이나타운을 알리는 가로등은 줄지어 서있습니다.

 

 

짜장면을 기념하는 조형물입니다. 만두처럼생긴 곳은 앉아서 사진을 찍기에 좋습니다.

 

 

짜장면에 대한 설명 '자장면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짜장면은 1950년대 부터 만들어 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유공원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가운데를 승천하는 용의 형상을 양각해 놓았습니다.

 

 

식당 양쪽에 마치 수호위처럼 서있는 조각상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에서 출토된 병사의 모습과 같습니다.

 

 

'의선당(義善堂)'의 모습입니다.

 

 

금분으로 장식한 의선당의 현판입니다.

 

 

의선당의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