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의 가볼만한 곳, 단원조각공원과 안산식물원-1

2011. 2. 28. 13:02사진 출사지

지난 주말, 조카가 득남소식이 전해 온지 약 3주가 지나 오산에 있는 조카집에 가기위해

집사람과 누님이 사시는 안산으로 향했습니다.

누님이 일이 좀 늦게 끝난다고 해서 안산의 볼만한 곳을 찾아보았습니다.

찾아간곳은 단원 조각공원이 있는 곳인데,

이곳에 '성호 이익'선생의 기념관도 같이 있었습니다.

 

 

벽면엔 안내 펼침막이 걸려있고 이익선생의 수결이 그려져 있습니다.

 

 

성호기념관 표지석이 서있습니다.

星湖는 1681년(숙종 7년) 11월 17일에 평안도 雲山군 그의 아버지의 귀양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통적인 남인 가계에 속하며 그가 태어날 당시는 남인이 정계에서 제거되어 급속히 몰락하여 가고 있었다.

이른바 庚戌大黜陟(숙종 6년 1680)으로 남인의 영수 許穆이 물러나고 성호의 아버지 李夏鎭도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평안도 운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다음 해에 부친이 별세를 하게 되었고 그 이후 그는 편모슬하에서 자라게 되었으며

두째 형인 李潛에게 학문을 배웠다.

26세 때에는 일생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의 학문적 스승이었던 두째 형 이잠이 당시 노론 집권당을 공격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 그것이다.

이 사건이 준 충격은 그에게 일체의 과거공부를 집어치우고 학문에만 전념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첫번째 전환기가 된 셈이다.

35세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이때에 노비와 세간살림등 일체를 종가에 돌려보내게 되었으며 이후로 그는 생계가 궁핍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그에게 있어서 두번째의 전환기인 셈이었다.

첫번째의 전환기가 그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것이었다면 두번째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생활상의 큰 변화는 그의 학문적 입장이 몰락하는 소토지 농민 일반의 이해를 대변하게 된

근본적인 계기가 된 것 같다.

그의 생활상의 처지는 실상 몰락하여 가는 농민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우리의 가난이 날로 심하여 송곳을 꽂을 땅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성호문집 권 20)고

하는 것은 저같은 처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47세에는 나라에서 관직을 주었으나 사절을 하였고 83세(영조 39년, 1763)에는 노인을 우대하는 벼슬을 주었으나

그해 12월 17일에 별세를 하였다.

그의 학문은 철저히 유교적 기반위에서 이루어졌다.

맹자로부터 유가의 모든 경전을 읽고 각기 경서에 대한 주석서인 疾書를 찬술하였다.

그는 경전을 주석하는데 "한 글자라도 의심을 하면 망발이라고 하고 참고하고 대조하는 것 만으로도 죄가 된다고 한다.

주자의 글도 이러하니 고대의 경전은 맣할 것도 없다.

이러하니 우리나라의 학문이 고루함을 면할 수 없다"(성호쇄설 권2 넌학문) 라고 하여

당시의 주자 주석 일변도의 고전 해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해석을 하려고 함을 알 수가 있다.

"선생은...경문의 주석에 의심이 되면 깊이 생각하여 의심이 풀리면 빨리 적어두고

의심이 풀리지 않으면 두고 두고 생각하여 해답을 얻은 다음에야 그만두기 때문에

疾書 가운데는 대부분이 앞의 유자들이 발견치 못한 것이다."

라고 말한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성호의 학문은 사변적인 지식의 탐구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힘써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실문제의 해결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현실문제에 뛰어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선현으로 栗谷과 磻溪를 들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오직 이율곡과 유반계가 현실문제에 뛰어난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혹은 눌려서

시행되지 못하였고 혹은 연구를 하였으나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고

하여 이 때문에 藿憂錄을 지었다고 한다. 藿憂錄은 현실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집중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정치 경제 사회등 당시의 제반문제를 19부문으로 나누어 국정의 폐단과

백성들의 어려움을 깊이 생각하여 그 구제책을 모색한 것이다.

한편 성호는 당시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서양의 여러 지식을 좋아하였다.

서양의 과학 기술에 관한 책 세계지도와 지리에 관한 것 천주교에 대한 교리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공부했다.

이를 통하여 그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문화관에서 탈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주체적 역사의식을 결여한 사관의 잘못을 지적하여 한국사 자체의 정통론(삼한정통론)을 내세우게도 되었다.

또 과학서적을 통한 천문 지리등에 관한 지식은 자연현상에 대한 고래의 인격적 도덕적 해석을

부인하게 되었고 실증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의 우수성은 인정하면서도 천주교 교리에 관하여는 유교의 입장에서

천당 지옥설과 천주의 강생에 대한 신앙은 환상적인 것으로 비판을 하고 있다.

성호는 서양문화를 과학기술과 천주교 신앙으로 구분하여 인식하고 평가하였으며

이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비판적 흡수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생애 및 학문경향, 사상 소개. 퍼옴)

 

 

반숙가(半菽歌) - 콩밥  Praise of Beans

"하늘에서 난 오곡에 콩이 한자리를 차지하니              

그 중에서도 붉은 콩이 특히 좋다 할 수 있네             

여름에 싹터서 겨울에 죽으니 달고 부드러워 맛 더욱 좋네                

가난한 집 재물 없어도 좋은 방편이 되고                 

쌀과 콩을 고르게 섞어서                                

가마솥에 푹 익혀 찌니 김이 올라 안개 같네              

한 사발 가져오니 훈기 가득서리고                       

쌀과 콩이 섞여서 엉기어 있네                          

봄바람에 여러 꽃이 겹겹이 피어                         

붉은 복숭아꽃 하얀 오얏꽃이 함께 있는 모양이네         

어른 아이 갈라 앉아 다투어 수저 들고                   

다 같이 씹으니 치아가 향긋하네                        

요즈음 고기 맛 잊은 지 오래니                              

듣자하니 부귀한 자들은 사치를 다투어                   

한 끼에 만 금 들여 고기를 나열 한다네                      

배불리 먹고도 그치려 하지 않고                           

백성 고혈 짜내어 제 욕심 채우나니"      

벽면에 붙어있는 '반숙가' 의 일부 입니다.

 

            

천천히 전시된 조각물들을 구경하기 시작 합니다.

어린아이가 놀고있는 작품은 '윤기호 님의 삶-존재의식'이란 작품입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울어진 전시공간이 도심의 삭막함을 덜어줍니다.

 

 

 벽면에 사람의 다리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에 도마뱀이 앉아있는  이 작품은 '이상수님의 불멸의 도시'라는 작품입니다.

 

 

메타세콰이어가 큰키를 자랑하는 산책로, 저 나무가 크게 자라나면 대단한 명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둥그런 구체를 정사각형 큐뷰로 감싸놓은 모습의 작품은,

'최병춘님의 만남의 공존'이란 작품입니다.

둥글고 모남이 만나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것 같습니다.

 

 

물구나무를 선 조각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손에 책을 들고 아래엔 노트북이 있는 이 작품은, '진덕제님의 물구나무서기'입니다.

거꾸로 바라보는 세상을 말하려 한것은 아닌지......

 

 

 아이들이 올라가 잔뜩 흙을 묻혀놓은 작품입니다.

 

 

동그라미 사이로 공중전화부스와 광고게시판이 보입니다.

'홍승남님의 존'이란 작품입니다.

영문으로 작은 구역을 일컫는 '존(Zone) 한문으로 존재한다 인지는 잘모르겠습니다.

 

 

아주 굵고 커다란 가래떡을 역어놓은 형상의 이 작품은, '정찬영 조각가의 카타르시스'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