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훼손당한 경희궁-1 (2011년 1월 16일)

2011. 1. 18. 10:41여행지/서울

서울역사박물관을 나와 옆에있는 경희궁을 찾았습니다.

'숭정문'을 바라보고 넓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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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지(慶熙宮址)
대한민국사적
Korea-Gyeonghuigung-01.jpg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과 숭정문
 
지정번호 사적 제271호
(1980년 9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1-126
제작시기 1616년

경희궁(慶熙宮)은 서울시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10년(1623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서울시에 있는 5대 궁궐 중에서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으며,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부지 7만 2천8백 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이다.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희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하였다.

경희궁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 시립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서울고등학교의 별칭과 경희대학교의 명칭 등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이 길도 옛날엔 궁궐이었을 터인데......

 

 

들어가는 입구인 '흥화문'입니다.

 

 

흥화문에서 바라본 안쪽모습입니다.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숭정문'의 모습입니다.

 

 

 

추운날씨 때문인지, 거의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본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네요.

 

 

'숭정문'의 모습. 관광객 두분이 문을 들어섭니다.

 

 

'경희궁터'를 설명하는 안내문이 있습니다.

역사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원종

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친 것이다.

경덕궁터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정원군)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광해군임진왜란뒤 재건된 창덕궁으로 들어가기를 꺼리고,

인왕산 아래 새 궁궐인 인경궁(仁慶宮)을 짓다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그의 집을 빼앗아 1617년(광해군 6년)~1623년(광해군 15) 사이에 경덕궁을 세웠다.

그러나 1623년 인조 반정 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경덕궁을 쓰지 못하였다.

 인조가 즉위한 뒤에 창덕궁이 소실되고,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타버리자 인목대비를 받들어 이 궁궐로 이어하였다.

이 곳에서 숙종이 태어났고,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하였으며,

숙종, 영조, 순조가 승하하였다.

경희궁은 경복궁 서쪽에 세워진 까닭으로 서궐(西闕)로 불렸고,

이 밖에도 새문안 대궐, 야주개 대궐, 새문동 대궐 등으로 불렸다.

경희궁은 순조 29년(1829년) 10월 화재로 인하여 전각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1831년에 중건하였다.

일제가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궁궐의 서쪽에 세우면서,

경희궁의 많은 전각들은 헐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정전인 숭정전은 일본의 한 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 본전으로 쓰기 위해 1926년 남산 기슭으로 이건되었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흥정당은 1928년 광운사로 이건되었으며, 관사대(觀射臺)는 사직단 뒤로 이건되어

현재 황학정(黃鶴亭)으로 쓰이고 있다.

흥화문은 1932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의 문으로 쓰였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폐사되고,

이후 신라호텔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경희궁터는 광복 후에 서울중ㆍ고등학교로 쓰이다가 1980년 6월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현대건설에 매각되었다.

그 뒤 서울특별시에서 이 터를 매입하여 사적 제271호로 지정하였으나,

시에서 경희궁터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세우면서 다시 훼손되었다. (다음백과)

 

 

 역사에서 보듯 너무나 민망합니다. 궁궐의 유린당한것도 모잘라 민간에 팔아넘기는 일까지 있었으니......

 

 

 '답도'엔 봉황이 새겨져 있습니다.

 

 

 '숭정문에서 바라본 '숭정전'의 모습, 그나마 아까 관광객분들이 있어 괜찮아보입니다.

 

 

 '숭정전'을 바라보고 왼쪽의 전각모습입니다.

 

 

이쪽은 오른쪽입니다. 품계석이 양쪽으로 놓여있는것만 보아도 정사를 돌보던 왕궁임이 분명합니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2층루각의 형태에 비해 왜소해 보이지만 엄연한 왕궁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건축물

경희궁의 아침

경희궁을 구성하는 전각들은 궁궐지, 서궐도안, 서궐영건도감의궤 등의 자료와 유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흥화문과 숭정문은 궁궐의 내외 출입문을 형성하였고,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융복전, 회상전, 흥정당, 자정전, 장락전, 집경전, 만학정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파괴되거나 이전되었다. 현재의 터에 남아 있는 것은

건물터와 원래의 자리로 다시 이전된 흥화문뿐이며, 나머지는 새로 복원된 것이다.

경희궁의 배치 형태와 공간 구성은 다른 궁궐과 달리 매우 독특하다.

정전인 숭정전 영역이 서쪽에,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영역이 동족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정문인 흥화문은 궁궐의 남쪽에 있지 않고,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정문에서 내전으로 진입하는 길은 침전 앞을 지난 다음 북으로 꺾어 정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흥화문

경희궁의 설경

흥화문(興化門)은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의 정문이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 오른쪽에 개양문, 서쪽에 숭의문, 북쪽에 무덕문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박문사(현재의 장충단 자리)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제가 이전하여 경춘문(景春門)이라 불렀다.

광복 후 장충동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1988년 경희궁터로 다시 옮겨왔다.

흥화문은 원래 경희궁터에 동남쪽 금천교 밖,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에 동향하고 있던 경덕궁 정문이었는데,

처음과 달리 지금 위치에 남향하여 세워졌다.

금천교

흥화문 안쪽의 홍예교(무지개다리)로, 광해군 11년(1616년)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에 묻혔다가 2001년 발굴하여 복원하였다.

숭정문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숭정전

숭정전(崇政殿)은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정전이다.

숭정전 일곽은 남향한 경사지에 축대를 조성하여 그 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숭정전은 행각으로 둘러졌으며, 뒤로는 자경전이 있다.

동ㆍ서 행각은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바닥과 지붕이 단을 이루며 높아지도록 조성되었다.

숭정전은 이중 월대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건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안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고,

현 위치의 건물은 1989년 12월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 10월 주변 행각과 함께 완공한 것이다.

자정전

현재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되어 있다. 이 건물은 주로 편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태령전

현재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되어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영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었다. 2000년에 서울시에서 복원하였다.

경희궁 방공호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주요 궁궐들을 대부분 파괴하였는데,

특히 경희궁의 경우 몇몇 이전한 건물을 제외하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경희궁 자리에 일제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녀들이 다닐 경성중학교를 세우는 한편,

전쟁 막바지인 1943년에 왕과 왕비의 침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방공호를 만들었다.

비상시 지휘본부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고 추정된다.

황학정

원래 경희궁에 있었던 정자인데, 일제때 팔려나가 현재 사직공원에 옛 등과정 자리에 있다.

(다음백과)

이것이 우리가 문화재를 대하는 태도이고 침략당한 역사의 비극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아픔입니다.

바로잡을 의지도, 복원할 엄두도 못내고 그저 왕궁이 있었던 곳이다 정도,

창덕궁에서 자부심을 느꼈다면 경복궁, 창경궁과 더불어 3대 궁궐이

이토록 초라해져 있는데 우린 무었을 했단말인지 새삼 서글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