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송년모임 창덕궁과 인사동-4 (2010년 12월)

2010. 12. 6. 14:14간이역

전각을 사이에 두고 올라온 나무를 담아봅니다.

 

 

삼형제와 같은 나무 세그루.

 

 

처음 만낫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원주에서 충협이 내외가 도착했다고 해서 회장과 총장은 먼저 약속장소로 향하기로 하고

 광연이 내외와 저희 내외는 북촌을 넘어 인사동으로 가기로 합니다. 전통문화상품을 판매하는 '동궐마루'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동궐마루 앞에 서있는 은행나무엔 아직도 은행이 달려있습니다.

 

북쫀길로 접어들어 가다보니 유럽풍 건물의 카페가 보입니다.  카페이름이 특이하네요 '개성 나드리'입니다.

 

 

북촌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위치한 '포토스팟'에서 바라본 '창덕궁'의 모습입니다.  담장 아래에 주차된 차들로 부득이 담장 밑부분을 잘라냈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 입니다.  역사가 바로서야 민족이 바로섭니다.

 

 

음식점 앞에 놓여진 나무의자와 항아리.

 

 

'우드앤 브릭'이란 카페입니다. 'Wood & Brick' 나무벽돌?  잠시 저녁햇살이 비추고 지나길래 담았습니다.

 

 

길 가 대리석에 '치우천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치우천왕에 대해 잠시 알아봅니다.

 다음은 '주영숙님의 카페 난정뜨락'에서 인용합니다.

 중국 사서를 보면 치우천왕을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가진 모래와 돌을 먹는 괴물이라고 기록하였다.

치우천왕을 괴물로 묘사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치우는 노산(盧山)의 금으로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는데,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용어하도에 이르기를 '황제가 섭정을 할 때 치우와 그 형제 81명이 있었는데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 말을 한다.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가졌고, 모래와 돌을 먹는다. 병장기로 칼, 창, 큰 활을 만들어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고 한다"   『사기』

 "도철(도깨비)을 치우라고 할 때 한 대의 화상석에서 치우의 형상은 항시 머리와 사지에 다섯 가지 병기를 든 인물로 그려져있다"  

『중국고대신화』

 "진 · 한 간에 말하기를, 치우씨는 귀에 검극을 달고 머리에 뿔이 있는데, 헌원과 싸울 때는 뿔로 사람을 맞닥뜨리니,

사람이 제대로 달려들지 못했다. 4개의 눈과 8개의 팔꿈치와 발꿈치가 있다.

한 무제 때 태원에 치우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거북이 다리에 뱀 머리였다."  『술이기』

 "치우는 주위 기름을 모두 먹어치우는 붉은 색의 괴물이라 적유라고 한다"  「산동성 수장진의 전설」

 "치우는 본디 남방 거인 부족의 우두머리로써, 그의 형제는 모두 81명이나 되었는데, 모두들 하나같이 키가 여러 장이나 되고,

불사신처럼 용맹스러웠으며, 머리에는 두 개의 견고한 뿔이 나있고, 귀 밑 털은 마치 칼날처럼 뻣뻣하며 눈은 넷, 손은 여섯,

발은 소의 발처럼생겼다. 먹는 음식도 괴상하여 모래와 쇳덩이, 바위 등을 먹어 치웠으며, 각종 무기를 제조하는 능력도 탁월하여

예리한 창, 마늘창, 견고한 방패, 거대한 도끼, 활과 화살을 만들어 무기로 사용하였고.

 알 수 없는 조화를 부려 콧구멍으로 안개를 내뿜었다."     『태평어람』

 위의 기록들에 의하면 치우는 괴상한 괴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과연 치우가 정말 모래와 바위, 쇠를 먹는 괴물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괴물 묘사에 숨겨진 비밀이 있을까?

그 해답은 삼성기, 태백일사, 규원사화 등 우리 측 사서에 있다.

 "몇 대를 지나 자오지한웅(慈烏支桓雄)이 나셨는데 귀신 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눌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고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레와 비카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이다."       『삼성기』

 "(치우천왕은)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였다.

유망의 정권이 쇠약하여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될 만한 인재 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에서 쇠를 캐내어

도개, 모극, 대궁, 호시를 많이 만들어 한결같이 잘 다듬더니 탁록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에 올랐다.

옹호산에 웅거하여 구야로써 수금과 석금을 개발하여 예과와 옹호극을 만들어 내고 ‥  "         『태백일사』

 "치우씨(치우천왕)는 백성과 함께 황하 이북에 자리잡고 안으로는 용감한 군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다가 유망이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군사를 일으켜 출정했다.

쇠를 캐어 칼과 창, 화살촉을 꾸준히 만들게 했다.

… 이 때 중국 사람들은 활과 돌의힘만 믿고 투구와 갑옷을 사용할 줄 몰랐다."     『규원사화』

 즉, 치우천왕이 당시에는 하이테크 기술이라 할 수 있는 금속문명을 이용하여 쇠로 된 무기를 만들고

갑옷과 투구를 걸친 모습을 보고 당시 중국 사람들이 이를 잘 알지 못하고 그저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가진 괴물로 묘사한 것이다.

더욱이 운급헌원기를 보면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잘 알지 못하고 구리머리에 쇠 이마라고 치우를 말한다"고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중국 사서에 기록된 치우는 당시 중국 사람의 눈에는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금속 무기로 무장한 치우천왕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상서 여형에서는 '고훈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키다라고 적은것은 그의 위엄이 무서워 기를 빼앗긴 탓'이락 하였다.

즉 당시 중국인들이 치우천왕이 너무 무서운 나머지 그를 괴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치우천왕이 안개를 일으켰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하나 치우천왕이 염초라는 풀을 태워 그 풀에서 나는 연기로 적을 혼란 스럽게 했다는 것,

둘, 치우천왕이 기무를 운용하여 안개를 일으켜 적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것이다.

요새도 기인이 있는 걸 보면 당시에 치우천왕이 기를 사용했음은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중국사서에서 왜 치우천왕을 괴물로 묘사했는지 그 실마리가 풀렸다.

그러니 우리는 치우천왕을 중국 사서에 기록된대로 괴물이 아니라 동아시아 최초로 금속문명을 사용하여

천하를 재패한 인물이라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치우천왕은 황제헌원에게 패했다?

 중국 역사서 중 대표적인 사서인 『사기』에 의하면 치우가 황제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기』는 치우를 "짐승의 몸에 사람 말을 하며 모래를 먹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책 사기 집해에서는 "치우는 옛 천자(蚩尤古天子)"라 하여 사기의 치우 묘사와 상반되는 기록을 남겼다.

더욱이 이상한 것은 진나라와 한나라 주민들이 치우를 전쟁의 신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은 전쟁에 앞서 항상 치우에게 제를 지냈으며,

천하를 통일한 이후 낙양에 치우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기까지 했다.

만약 치우가 황제헌원에게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면 왜 중국인들은 황제가 아닌 치우를 전쟁의 신으로 모셨을까?

중국인들이 치우를 전쟁의 신으로 모신 것, 그것은 간단하다.

치우가 전쟁에서 항상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세인들은 치우천왕을 軍神으로 추앙한 것이다.

『사기』에 "산을 해쳐 길을 만들어도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탁록하에 도읍을 정하고도 이리저리 쫓겨다니느라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하여금 영문을 지키게 했다" 라는 기록과

관자의 『삼조기대재기』의 "치우가 죽은 후 천하가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황제는 마침내 치우의 형상을 만들어

통치에 앞세우고 치우가 죽지 않았다 하였으니 천하가 두려워하고 팔방만방이 복종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으로 보아 치우는 헌원에게 패했다고 볼 수 없다.

만약 헌원이 치우를 죽였다면, 왜 그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군사와 병졸로 하여금 영문을 지키게 했을까?

더욱이 치우가 죽지 않았다고 하자 날뛰던 제후들이 잠잠해졌다는 것은 당시 치우의 위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즉 치우는 여러 제후들의 우두머리인 천자였으며, 헌원은 그런 천자인 치우천왕에게 도전한 인물인 것이다.

그러니 중국사서의 '치우작란'(치우가 난을 일으켰다)은 '황제작란'(황제가 난을 일으켰다)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천자는 화하족 수장인 헌원이 아니라 동이겨레의 수장이며 배달국의 한웅인 치우천왕이었기 때문이다.

 3. 동방의 군신 치우천왕

 기원전 2700년 경 배달나라(倍達國:檀國)의 제14대 자오지 한웅인 치우천왕(蚩尤天王)
 
치우(蚩尤 혹은 治尤)는 상고시대(B.C 2700년경)의 인물로서 이른바 ‘천하융사지주(天下戎事之主)’라고 평가되던 전설적 영웅이다.

이에 관해서 중국측과 우리측 모두 관련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중국측 기록에는 매우 곱지 않게 표현되어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가 치우천왕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러하다.

  “치우는 노산의 쇠로써 오병을 만드었다. 그런데 치우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 황제가 섭정을 할 때 치우와 그 형제 81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였다.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가졌고, 모래와 돌을 먹었다. 병장기로 칼, 창, 큰 활 등을 만들어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사기』     

『사기』의 내용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이 모래와 돌을 먹었다니?

그러면 괴물이었단 말인가? 사마천은 왜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그 까닭은 치우가 다름아닌 동이(東夷)겨레의 수장이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치우에 관한 몇 가지 단서를 알 수 있다.

적어도 치우가 각종 병장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상고시대 금속제 병장기를 만들었음은 고도의 기술수준이 바탕이 되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 당시 우리 겨레가 높은 금속관련 기술을 갖추었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이에 관한 우리 측의 기록을 보면 치우와 동이겨레의 수준이 적나라하게 확인된다.

우리측 기록에 치우는 일명 ‘치우천왕’으로 통칭되던 존재였다.

말 그대로 당시 치우는 하늘의 임금이었던 것이다.

 "몇 대를 지나 자오지한웅(慈烏支桓雄)이 나셨는데, 귀신 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고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레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이다 " 『한단고기』 「삼성기전」 下

 " (치우천왕은)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셨다.

유망(楡罔)의 정권이 쇠약하여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될 만한 인재 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葛虜山)에서 쇠를 캐내어

도개(刀鎧), 모극(矛戟), 대궁(大弓), 호시(楛矢)를 많이 만들어 한결같이 잘 다듬더니 탁록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에 올랐다.

 … 옹호산(雍狐山)에 웅거하여 구야(九冶)로써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개발하여 예과(芮戈)와 옹호극(雍狐戟)을 만들어 내고 …     

『한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

 "치우씨는 백성과 함께 황하 이북에 자리잡고 안으로는 용감한 군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다가

유망이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군사를 일으켜 출정했다.

이 때 형제와 친척 중에서 우두머리 될 만한 사람 81명을 뽑아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갈로산(葛虜山)에서 쇠를 캐어

칼과 창, 화살촉을 꾸준히 만들게 했다.

… 이 때 중국 사람들은 활과 돌의 힘만 믿고 투구와 갑옷을 사용할 줄 몰랐다"           『규원사화』 「태시기」

 즉, 치우천왕이 당시에는 하이테크 기술이라 할 수 있는 금속문명을 이용하여 쇠로 된 무기를 만들고

갑옷과 투구를 걸친 모습을 보고 당시 중국 사람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그저 구리 머리에 쇠 이마의 괴물로 묘사한 것이다.

더욱이 『운급헌원기』를 보면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잘 알지 못하고 구리머리에 쇠 이마라고 치우를 말한다”고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중국 사서에 기록된 치우는 당시 중국 사람의 눈에는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금속 무기로 무장한 치우천왕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치우천왕의 치적을 몇 가지로 추려보면 벽토지(闢土地), 흥산(興産), 작병(作兵), 연병(鍊兵), 그리고 뛰어난 숭생중물(崇生衆物)의 치세이념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벽토지란 산과 계곡을 뚫어 길을 냈음을 말한다.

교통의 발달을 꾀한 것이다.

흥산이란 산업을 진흥시켰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기의 일부 내용처럼 노산 등지의 광물을 뽑아 제련사업을 일으켰던 것이다.

특히 이때 치우천왕은 구야(九冶)라고 하는 일종의 기술부대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작병이란 각종 병장기를 만들었음을 말하는 것이요,

연병이란 강력한 군대를 길렀음을 뜻한다.

그리고 숭생중물이란 치우천왕의 치도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이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온갖 물상의 존귀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이는 마치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홍익인간 정신에 구현된다고 볼 수 있다.
치우천왕은 그야말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이념으로 겨레의 앞날을 열고자 땀흘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치우천왕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동이겨레가 치우천왕이 늘 경외하던 ‘밝은 하늘의 뜻’을 무시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이단성을 주도하던 인물이 한족(漢族)인 공손헌원(公孫軒轅)이었다.

그리하여 치우천왕은 공손헌원과 일전을 벌렸다.

그러던 중 마침내 공손헌원족의 한 갈래인 ‘소호’의 부대와 맞붙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치우천왕은 각종 기술과 기상을 조화하여 커다란 안개를 펼쳤다고 한다.

소호의 부대는 앞을 가리지 못한 채 괴멸되어갔다.

이 전투가 끝난 뒤에도 공손헌원 부대는 치우천왕 측에게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물과 불을 마음껏 다스릴 줄 알았다.

치우천왕측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게다가 치우천왕의 놀라운 웅략(雄略)이 그들을 압박하였다.

이른바 ‘분출사도(分出四道)’라고 하는 전법이 공손헌원 부대를 여지없이 깨뜨려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치우 측은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돌날림치게)라는 新 전투장비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치우천왕 부대는 대승 하였다.

뛰어난 전법과 신(新)장비의 효과가 컸던 것이다.

그리하여 치우천왕은 겨레의 오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치우천왕은 죽은 뒤, 후세 사람들에게 군신(軍神), 승리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게다가 민간에서는 기와에 도깨비 무늬(鬼面瓦)라 하여 잡귀와 액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치우천왕은 돌아가신 지 수 천년이 지났지만, 그의 영걸스러운 혼백은 오늘날까지 귀면와, 장승, 사천왕상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지난 2002년 월드컵 때는 붉은 악마로 부활하여 한국의 4강 진출이라는 놀라운 기적을 이루어냈다.
치우천왕의 웅략은 소중한 우리의 정신자산이 분명하다.

몹시 어려운 오늘에 있어 치우천왕은 더욱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

우리는 그동안 치우천왕에 대해 잘못 알고 있지 않았나 싶다.

치우천왕은 전쟁을 좋아하는 전쟁광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치우천왕은 누구보다도 평화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파괴와 살육으로 천하를 통일하려는 헌원과 달리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세상을 바란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화와 공존을 파괴하려는 헌원에 맞서기 위해 전쟁이라는 검을 들었다.

규원사화를 보면 치우천왕은 헌원과 판천대전, 탁록대전, 구혼대전 등 73회에 걸친 전쟁을 벌이면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중토(중국)의 많은 백성들이 전쟁으로 많이 죽자 부질없이 무고한 백성을 죽일 수 없다며 신의 없는 헌원의 항복을 받아내고

군사를 물러낸만큼 평화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치우천왕.....

그는 최초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으며, 금속제 무기를 만들어 동양사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전쟁에 항상 승리하는 군주였다.

현재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내세우며 우리의 역사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다.

만약 중국의 동북공정이 성공하면 우리의 옛 역사 발해, 고구려, 고조선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로 둔갑하고 말 것이다.

이미 중국은 티베트와 몽골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만들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우리의 역사를 지켜야 한다.

치우천왕....

요즘같이 힘들 때 그의 이름을 곱씹으며 우리는 결의를 다져 역사전쟁이라는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승리를 해야 할 것이다.

치우천왕의 후손인 우리에게 치우천왕의 가호가 함께 하길 빌며....

난 왜곡된 치우천왕을 재평가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러한 사실이 비교적 완벽하게 입증이 된다면?  너무나 해피한 국민이 되는 것이지요~~

 

 

 보호수로 지정된 고목입니다.

 

 

까치가 2개동을 지어 살고 있습니다.

 

 

 

 

북촌마을 주택가의 골목을 뒤로하고 인사동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