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고장 영주여행, 선비문화의 중심, 선비촌, 소수서원-5】

2012. 12. 13. 11:44여행지/경상북도

복원해 놓은 안동장씨 종택의 모습입니다.

 

 

물론 실제의 종택은 영주땅에 실제로 있습니다.

화계정사란 현판이 사랑채에 걸려 있는것으로 보아 학문의 수련정진 장으로 사용된듯 합니다.

 

 

세종때 부터 성종때까지 이름을 떨친 장말손이란 분의 종택이라 합니다.

 

 

가옥의 구조나 이러한 설명은 여러곳에 소개가 되어있어 생략을 하겠습니다.

 

 

하지만 종택 답게 사당까지 갖추고 있는 규모가 있는 종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선비들의 휴식공간이라 할 수 있는 정사도 복원되어있습니다.

 

 

학문에 정진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자연속에서 사색하고 진정한 선비의 길이 무엇이고,

무엇을 행하고 금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을 하였을겁니다.

 

 

그 추구함의 또다른 하나가 거구무안(居求無安) 이라 하였다지요.

이는 사는데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하면서 자연의 이치와 사람의 살아나가는 길을 고민하였다고 합니다.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김으로 인격수양을 하였고, 비록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여도

결코 불의에 굽힘이 없고 의를 위해 목숨도 초개와 같이 여긴다는 것이 수양의 의미였다고 합니다.

 

 

선비촌문화수련원도 있어 실제의 체험과 배움도 얻을수 있는 곳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선비가 거닐었을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봅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정신은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입니다.

이는 가난함 속에서도 바른 삶을 중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선비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여 부유함을 얻기보다는 가난하지만 바르게 사는 길을

선택하는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정신이 올곧이 내려온 분들이 청백리입니다.

 

 

지금의 시대정신과 맞을까요..?

분명 맞습니다, 다만 실천하려는 사람이 드물고 일반인들 조차 오히려 이러한 정신을

바보나 어리석음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문제 아닐까요.

 

 

그러한 세태를 어찌해야 할까요. 저 약탕기에 선비정신 듬뿍 넣고 정성스레 달여서 복용하면 고쳐질까요.

 

 

약먹고 고쳐질 그릇됨이라면 그렇게라도 해보고 싶습니다.

 

 

기와집에 살건, 초가집에 살건, 선비들의 옳곧음은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패거리 정치와 권력이 등장을 하면서

그러한 정신들은 퇴색이 무색하리만치 변색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음의 밭을 갈지 못하고 권력과 금력의 밭을 가는데 혈안이 되고 말아버린거지요.

그 근간이 흔들려 버린 정신나감이 오늘날까지 민초들의 삶을 억울하게 만든것은 아닐까요.

 

 

소달구지 타고 동네한바퀴 도는 체험도 있습니다. 물론 유료지요.

 

 

낡은것은 바꾸어야 합니다.

 

 

그 바꿈이란 근간을 뒤집는 것도 되겠지만 참 의미는 원래대로의 복원이지요.

단단히 엮은 이엉도 수 해가 지나면 바꿔줘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선비정신의 올바른 복원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굳이 한자로 표현되는 글귀가 아니더라도, 그 속에 담긴 뜻을 옳게 행동에 옮기도록

인격을 갈고 닦아야 함은 아닐런지요.

그런 바탕으로 아이들을 훈육하고 바름을 보여준다면 굳이 선비의 길이라 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도리로 가는것이라 생각을 해봤습니다.

 

 

동네를 한바퀴 돌고 소달구지가 들어옵니다.

 

 

보기에도 나이가 들어보이는 소는 자기의 의무를 하고 쉬고있습니다.

 

 

가격이 그래서 그런지 어른들은 거의 이용을 하지 않고, 아이들만 가끔 타고 신기해 합니다.

 

 

붉게 익어간 산수유를 바라봅니다.

 

 

자연의 섭리대로 익어간 산수유, 그리고 낡은 지붕을 바꾸는 마을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의 이치를 깨달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없는지 제자신을 다시금 살펴봅니다.

 

 

선비정신에 몰입해본 선비촌을 떠나갑니다. 이로서 영주여행의 일정도 마무리로 들어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영주시내에서 마지막으로 보려고 봉서루에 도착을 했습니다.

 

 

멋진 소나무가 반겨주니 기분이 좋습니다.

 

 

순흥의 흥망과 연관이 있었다는 봉서루를 바라봅니다.

 

 

봉서루에 대한 소개를 보자면 이렇습니다.

 【옛날에 순흥은 한산한 고을이었다.

하루는 지리에 능통한 이인(異人)이 나타나 지형은 번성할 곳이나 앞이 너무 허해서

순흥의 진산인 비봉산의 봉이 남쪽으로 날아가 이곳이 흥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것을 듣고있던 고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자 남쪽에 큰 누각을 짓고 오동나무를 심어

봉이 못 가도록 알을 만들어 두면 이 지방이 흥하고 명인이 많이 날 것이라고 하고 사라져 버렸다.

고을 사람들이 너무 이상해서 서로 수의를 거듭한 결과 읍에서 남쪽 1.5㎞되는 곳에 큰 누각을 짓고

봉서루라고 이름하고 그 옆에 흙을 쌓아 봉의 알을 세 개 만들고 누각 앞에 오동나무를 많이 심어 두었다.

몇 년 안가서 이인(異人)이 말한대로 글 잘하는 선비와 이름난 무인이 나고 또 고을이 번성하게 되었다.

수 백년이 흘러 일제 시대가 되어 새로운 교육제도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1910년경에 보통학교를 이 공청(空廳)을 이용해서 세우게 되었다.

1927년경에 와서는 6년제 보통학교가 12학급이 되어 봉서루 상하층 두교실을 사용하고도 두교실이

모자라게 되었고 당시 면사무소는 옛날 동헌을 사용했으나 너무 헐어서 개축을 해야 될 판이었다.

지방 유지들이 봉서루와 페문루를 합해서 면사무소를 짓고 순흥 보통학교에서 동편으로 4개 교실을

연장해서 동서로 길게 짓기로 했다. 그래서 3월에 봉서루를 헐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밤에 목수가 꿈을 꾸니 봉서루에서 큰봉이 날아 자기 앞에 와서

"너는 왜 내가 천년동안 살아온 집을 허느냐?

만일 네가 중지 하지 않으면 큰 변을 당할 것이다"하고 가는 것이었다.

꿈이 깬 다음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발설도 아니하고 봉서루를 다 헐었다.

12개 교실 동쪽편의 교상 목수간을 만들고 거기에 교실 지을 나무를 많이 갖다 놓고 대패질을 하다가

점심을 먹으로 간 다음 담배불이 대패밥에 붙어 그불이 천장을 통해 12개 교실 서편부터 연기가 나면서

동시에 불이 붙게 되어 학생들이 공부하다가 책보를 둔채 운동장으로 뛰어나와 책도 다 타고

학교의 비품도 다 타버렸다.

순흥, 풍기, 영주의 소방차가 왔으나 너무 화력이 강해서 소방호스의 물이 화염을 뚫지 못하고

다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봉서루 앞에 큰 오동나무가 몇그루 있었는데 그 생나무에 불이 붙어 타고 말았다.

그 나무속에 있던 봉서루 지키미 큰구렁이도 타 죽고 말았다.

그 후 순흥 보통학교는 지방민의 여론에 따라 읍내로 옮겨지고 봉서루는 현재의 면사무소 옆에 우뚝 솟아 있으나순흥은 인물도 나지않고 지방의 번영이 점점 쇠해만 가고 있다.

봉서루는 최소한 800년은 되는 해묵은 건물이라고 생각된다.

유명한 안축 선생의 중수기가 그것을 말해주며 안축 선생은 약 700년전 사람이다.

오늘날 주민들은 모두 그때 봉서루를 헐어 읍내로 옮긴 것을 후회하고 있다. (출처 : 다음카페 풍우회)】

 

물론 전설에 기인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또하나의 유서깊은 유적의 소실이라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물론 유서깊은 유적이 사라졌음은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유적보다도 더 가슴 아픈것은 강점하고 지배한 원수같은 존재를

은근히 닮아가고 그것을 당연시 하면서 찬양하는 자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떵떵거리면 산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정신을 망각하고 스스로의 뿌리를 서슴없이 부정하는...

역사의식과 철학마저 비루하게 만들어 버리는 자들과 그 후손들에게

내 조상이 살았고 나와 내 후손이 살고 있고, 또 살아나가야 할 내 조국이

휘둘린다는 생각을 해보십시요...   선비정신을 되새기며 돌아본 영주땅...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고 자랑스런 윗대가 되고 싶다면 의식의 변환이

필요하다는 다짐을 하면서 영주땅을 떠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