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떠나다, 1박2일 아산, 예산, 덕산-5】

2010. 7. 3. 11:02여행지/충청남도

윤봉길의사의 "충의사"를 들러 덕산 "수덕사에 왔습니다. 

일주문을 들러서는 아내의 모습이 약간 개구 스럽내요.

 

  

일주문 들어서기 앞서 좌측으로 진짜 여인숙이 보입니다. "덕수여인숙"

실제로 영업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지방 중소도시 어디를 가도 지금은 간판조치 찾기힘든 "여인숙"

산사의 입구에서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소전 손재형"의 "동방제일선원"이란 일주문 현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나이먹은 탓에 약간 한문을 알아 조금은 편리할 때도 있습니다.

 

 

 여류화가 나혜석이 최초로 머물렀던 "수덕여관"이 일주문 지나 몇 걸음 않가서 우측에 있습니다.

고암(이응로)이 머물며 작품활동을 했던 수덕여관이 있습니다.

이곳은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6)이 5년간 살았던 곳이며,

나혜석은 만공 스님으로부터 “너는 스님이 될 재목이 아니다.”고 거부당하자

수덕여관에 묵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합니다. 

이 여관은 나혜석의 영향을 받은 고암이 1944년 매입, 1958년 프랑스로 유학가기 전까지 살았고.

그는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이곳에 잠시 묵기도 했습니다.

그가 새긴 암각화 2점과 현판이 남아있습니다.

 

 

옆에서 본 수덕여관.

 

  

고암의 "문자 추상 암각화" 입니다.

 고암(죽사) 이응로화백은 충남 홍성 출생으로1923년 서울로 올라와 당시 유명한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사군자·묵화 등을 배웠다. 이듬해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묵죽 墨竹〉을 출품하여 입선했고,

1935년 일본으로 가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에게 사사했으며,

혼고[本鄕] 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 기법을 공부하기도 했다.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 상을 받고, 이후 1945년까지 선전과 일본화원전에서

입선과 특선 또는 무감사로 계속 출품했다. 1946년 배렴·장우성·김영기·조중현 등과 함께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했으며, 1948년 홍익대학교 주임교수로 있었다.

특히 1962년 파리 파케티 화랑에서 평론가 자크 라세뉴의 주선으로 콜라주전을 열었으며,

1965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차지해 주목받았다. 이해부터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개설하여 묵화·서예 등을 가르쳐 3,000여 명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1967년에는 6·25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프랑스 정부 주선으로 석방,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 일로 인해 국내화단과 단절되었으나 스위스와 프랑스에 이어 일본·미국·벨기에를 중심으로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전개했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7년 문헌화랑에서 신작 〈무화 舞畵〉로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해 백건우·윤정희 부부납치음모라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와는 완전 단절되었다.

이후 1985년 도쿄[東京]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1989년 호암 갤러리에서 초대전이 열리던 중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다음백과)

 

 

대웅전 올라가는 길 옆에 아이가 커다란 거북석상 앞에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천왕문을 들어섭니다.

 

 

"선지종찰수덕사"라 쓰인 편액이 멀리 보입니다.  그밑에는 "덕숭총림" 이라 쓰여있습니다.

 수덕사 창건에 얽힌 설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옵니다.홍주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수덕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다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개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덕산 향토지 수록)

 

 

 

 

 

 

 

 

수덕사 대웅전 (7백년이 넘는 세월을 굳건하게 지켜온 고찰)

국보 제49호. 앞면 3칸, 옆면 4칸에 겹처마와 맞배지붕을 지닌 주심포계 건물이다.

배흘림이 현저한 기둥은 낮고 기둥 사이는 넓어서 안정감을 주며, 헛첨차를 써서

공포가 주두(柱頭) 아래에서 시작되는 백제계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마루보와 대들보의 낙차를 크게 두고 우미량을 겹으로 걸어 지붕에서부터 계속된 우미량의

율동미가 소슬합장의 곡선, 이중량(二重樑)의 곡면과 함께

백제계 특유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1937년부터 4년간에 친 해체·수리 작업중에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1308년(충렬왕 34)에 세워졌음이 확인되었다. 충청남도 지역의 대표인 건물로서

건축연대가 뚜렷하며 이 시기 목조건물 양식편년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다음백과)

 

 

 

 

명부전은 지옥 중생의 이고득락을 기원하는 전각으로 주존은 지옥중생의 구제를 서원한 지장보살이다.

전각내에는 지장보살과 유명계 판관인 시왕이 봉안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덕사 명부전은 1968년에

원담스님이 건립하였으며 지장보살 후면에는 목각후불탱과 목조시왕상을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대웅전 뒤에 돌러 만든 개구리 3마리가 있습니다.

가족같은 모습입니다.   어디를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