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3. 11:49ㆍ여행지/충청남도
대웅전 편액을 바라보고......
관음바위에 동전을 붙이려 많이들 고생합니다.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봅니다.
비구니들이 수행하는 견성암으로 가는 길.
스님들께서 묵언수행중 인가봅니다.
"말은 밖으로 치닫는 연습이며, 묵언은 안으로 치닫는 공부입니다"란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과연 사람이 말을 하지않고 지낸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울까요?
아마 내공이 뒷받침이 않되면 울화가 치밀것입니다.
스스로 정화되지 않는 다면, 과연 일반인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묵언할 수 있을까요?
멀리 산중턱에 암자가 보입니다.
"무심(無心)이란 찻집이 있네요.
아내와 따뜻한 차 한잔 하기위해 들러갔습니다.
무심하다는 말이 야속하다, 무정하다, 등 사실 않좋은 쪽으로 많이 쓰이지만,
불가에서는 무심이야말로 즉 불교라는 성철스님의 말씀도 있습니다.
차가운 날씨와 바람에 아내의 머리가 약간 흩어졌습니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벽에 붙어있는 좋은 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차 한잔에 몸과 마음이 훈훈해 집니다.
이렇듯 아내와 함께하는 여행은 늘 따뜻합니다.
해탈교를 건너 다음 목적지를 향합니다
해탈(解脫)(영:moksha)
'해방된다'·'자유로 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심신의 고뇌·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이 해탈에 대한 생각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의 사상계에 보급되어 있었던 것으로서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궁극적인 이상 목표를 이 해탈에 두고 있다. 이는 불교도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고뇌를 낳는 근본으로서의 무명을 멸함으로써 해탈의 도가 달성된다고 한다.
즉, 무명은 지혜가 없는 것이며 그 지혜란 세계인생 진리로서의 연기의 도리를 여실하게 아는 작용이며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은 여실하게는 지견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무명을 멸해서 모든 존재가 상의상대(相依相待)라고 하는 연기의 관계에 있음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 고뇌의 속박을 벗어나 이상을 달성하는 길, 즉 해탈의 도라고 했던 것이다.
이 해탈에의 도는 중도(中道)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팔정도(八正道)의 수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해탈은 불교에서는 이상으로서의 열반과 동일시되고 있다. (다음백과)
이 다리를 건너면 해탈할 수 있을까?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삶에서의 욕심을 조금만 줄이고 살아간다면 해탈에 조금은
가까워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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