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떠나다, 1박2일 아산, 예산, 덕산-4】

2010. 7. 2. 17:31여행지/충청남도

 매헌 윤봉길의사를 기리는 "충의사"에 왔습니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앞에보이는 충의문을 지나면 사당이 나옵니다.

 

 

 

 

 

충의문 들어서기 전 왼쪽으로 아름드리 나무가......

 

 

 

 

 

윤봉길의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충의사"입니다

 

 

참배하고 향올리고 내려옵니다.

 

 

 

 

 

광현천하대장군, 저한천하대장군 장승, 두 대장군 장승은 윤의사께서 태어나신 광현당과,

성장하신 저한당을 의미한다.

 

 

보부상 (褓負商)

부상은 무게나 부피가 크고 값이 비교적 낮은 상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등짐장수를,

보상은 부피가 적고 가벼우며 비교적 비싼 상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봇짐장수를 말한다. 요컨대 부상과 보상은 취급하는 상품이나 운송수단에 의해 구분된다.

1899년의 상무사장정(商務社章程)에 의하면 부상의 취급물종은 어물·소금·미역·무쇠그릇[生水鐵]·

토기(土器)·목물(木物)·담배·누룩·죽물(竹物)·노석(蘆席)·꿀·마소바리[于馬馱]·뱃짐·삼[麻]이고, 보상의

취급물종은 포(布)·백(帛)·면(綿)·릉(綾)·지물(紙物)·주물(紬物)·저속(苧屬)·금·은·동·삼(蔘)·돈피(撴皮)·

수달피(水獺皮)·면화·피혁 등이 있다.

 

 

기원 및 조직

상설점포가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행상은 상품유통의 주된 담당자였다.

 장시(場市)가 없던 조선 초기 행상은 촌락을 돌아다니며 매매했고 장시가 발생한 이후에는

                           점막(店幕)에서 잠을 자고 장날에 맞추어 장시를 순회하면서 매매했다. 객주(客主)가 발생한
                          이래에는 객주를 주인으로 삼고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행상은 육상(陸商)과 선상(船商)으로
                          나뉘는데 전자의 가장 일반적인 수송수단은 지게나 보자기였다. 그런 점에서 조선초부터 부상이나
                          보상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보부상은 단체를 이루어 행상활동을 조직적으로 영위하기도 했다. 보부상단은 부상(富商)에 의해서,
                         또는 영세한 행상들의 자구적인 노력에 의해서 조직되었다. 전자의 한 예를 들면, 1870년대에 황해도
                         서흥군 목감면 입암리에서 상업자본가이며 보부상의 우두머리인 '처서순'이 사기점(沙器店)을
                         장악하고 그 제품을 인수하여 부하인 보부상으로 하여금 판매하게 했다. 개성의 부상이 차인(差人)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행상을 시킨 것도 같은 유형으로 보인다. 문헌에서 최초로 확인되는 후자의
                         보부상조직은 1851년 예산의 행상, 그리고 홍성·결성·보령·청양·대흥 5읍의 행상이 한성부완문
                        (漢城府完文)에 의거하여 각각 임방(任房)을 창설한 것이다. 부상 중에는 1866년 병인양요에서
                       세운 공훈으로 도반수(都班首)와 도접장(都接長)으로 차정(差定)되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보상단은
                       1879년에, 부상단은 1881년에 정부의 주도에 의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했다. 1883년에는
                     혜상공국(惠商公局)을 설립하여 보부양단(褓負兩團)을 통합, 관장했다. 1885년에는 혜상공국이
                      상리국(商理局)으로 전환되면서 부상단은 좌단(左團), 보상단은 우단(右團)으로 재정비되었다.
                      정부가 이처럼 보부상단의 활동에 직접 개입한 것은 행상업을 관장하고 장시세(場市稅)와 같은
                      상품유통세를 징수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보부상은 정부의 보호를 받음으로써 관리의 수탈을
                      피할 수 있었고 행상업의 독점을 도모하게 되어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함에 따라 보부상의 지역
                     조직이 한층 강화되고 보부상단의 가입자도 증가했다. 1894년경 전국의 보부상 수는 약 25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후 1895년 상리국과 각 도의 임방을 폐지한 이래 보부상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1897년에는 '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에서, 1898년에는 '황국협회'(皇國協會)에서
                    보부상단과 관계를 가졌으며, 1899년 정부에서 상무사(商務社)를 설치하여 보부상단을
                    통섭했는데 그 활동은 부진했다. 19세기 후반 보부상단의 조직을 보면, 일반적으로 몇 개의
                    군·현을 관할범위로 했다. 관할지역의 각 장시에 있는 임소(任所)마다 본방(本房) 1인을 선출하여
                     임소의 사무를 맡기고 본방 중에서 접장(接長)을 선출하여 상단의 사무를 관장하고 상단을
                    대표하게 했다.
                   접장을 거친 사람이 반수(班首)나 영위(領位)가 되는데, 이것은 명예직이었다 (출처 : 다음백과)
 
 

활동

보부상단은 대내적으로 질병이나 사망의 경우에 상호 부조하고 상도의(商道義), 단원간의

 예의·신의·성실 등에 관한 엄격한 규율을 실행했다. 대외적으로는 관리의 수탈, 토호나

                                객주의 횡포에 대응하고 나아가 행상활동을 독점적으로 수행하며 특정 물종에 대한 독점권을
                               획득하고자 했다. 특히 부상단은 어물·소금·수철(水鐵)·목물·토기 등 5종 물종의 독점권을
                              추구하는 데에 진력했다. 보부상은 정치적 활동도 수행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행주산성전투에서,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서 식량과 무기를 운반·보급하고 전투에도 참여하여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보부상은 보수적인 집단으로 기능하기도 했는데, 갑오농민전쟁 때에는 농민군과 대립했고
                          황국협회가 독립협회를 분쇄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출처 : 다음백과)

 

 

 

 

 

 

 

 

하늘높이 기러기떼가 날아갑니다.

 

 

윤의사 어록탑이 드높게 솟아 있습니다.

 

 

좌측 "인생관"에는

목계일곡수 : 목바리(윤의사 사시던 곳의 지명) 한구비 시냈물

수덕원자류 : 선비의 기개가 맑고 맑아서 만고에 빛나리

척오신오예 : 내 몸에 때를 씻어

무진격천추 : 끝이 없음을 천추에 맞서리이다.써있습니다.

실로 올곳은 선비의 기개가 그대로 묻어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측 "학습관"에는

불후성명사기명 : 길리 드리울 그이름 선비의 기개 맑고

사기명명만고청 : 선비의 기개가 맑고 맑아서

만고청심도재학 : 만고에 빛나는 마음은 학문에서 우러나며

도재학행불후성 : 그 모두가 학행에 있으니 그 이름 쓰러짐이 없으리.

학문의 갈고 닦음에 무한정진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앙엔 이 어록탑을 세운 "월진회"의 "월진회가"와 "월진회 금언" 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월진회는 윤봉길 의사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농촌의 발전을 위하여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세운

         민간단체로, 부업을 희망하는 농가에 새끼 돼지 한 마리씩 나누어주고 기르게 하며 도 사육하게

         하는 활동을 폈다.

         1929년 4월 23일에 윤봉길과 그의 의형제 황종진[1] 등 37명의 발기인이 모여 창립하였으며,

         목표는 실력 배양과 경제 부흥을 통한 조국 독립이었다. [2]

         현재 서울 양재 시민의 숲에 있는 윤봉길의사기념관에 월진회기(旗)가 전시되어 있으며,

        국기게양대에도 월진회기(旗)가 게양되어 있다. 월진회기(旗)는 태극기와 같은 하얀 바탕에 3개

        초록색 굵은 선이 있고 가운데 무궁화꽃을 넣은 깃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