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의 도시, 경주의 가볼만한 곳 -7】

2011. 8. 6. 10:07여행지/경상북도

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장에 왔습니다. 귀족마을, 신라궁궐, 화랑산채, 화랑연무장 등이 이곳에 있습니다.

 

 

 이곳이 귀족미을입니다.

가끔은 이런생각을 해봅니다.

어떻게 천 수백년전의 가옥이 지금에 와서도 각광을 받느지...

한옥의 우수성은 어디어서 오는지, 그런 한옥을 왜 우린 외면하고

독성물질 가득한, 그리고 갑갑하기 이를데 없는 아파트란 괴물에 미쳐있는지...

서울 은평뉴타운 지역에 주거용 한옥마를을 조성 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한채를 짓는데 무려 18억이나 든다니...

이걸 한 13억 정도로 낮추기로 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아파트보다 비싸서 못지은건가? 땅값이 워낙 비싸서?

하지만 개량형 한옥을 짓는다면 그리 커다란 공간이 아니라도 가능 할 터인데.

또 무조건 크고 멋지게하는 디자인 서울 어쩌구가 들어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30년이 채 못가는 아파트보단 최초 건축비가 더 들더라도 100년은 껌으로 여기는

우리의 한옥이 경제성, 환경성, 건강한 생활에 훨씬 좋을거란 생각입니다.

 

 

입구 왼쪽엔 연못과 정자가 있습니다.

 

 

이런 풍광은 마치 내가 옛날의 어느날로 와있는 그런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귀족마을의 설명과 함께 골품제의 하나인 성골이 사는 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배롱나무꽃이 화사한 귀족집의 처마에서 과거의 영광을 엿보고 있습니다.

 

 

성골엔 못미치지만... 그래도 진골의 집입니다.

성골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귀족이지요 양가(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왕족이어야만 가능했다고 하니...

잠시 다음백과에 나오는 성골과 진골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합니다.

【신라시대에는 지배층의 신분제도로서 골품제가 존재했는데,

성골은 그 골품 가운데 왕족만이 속한 가장 높은 신분이었다.

그러나 성골은 제28대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했고 그뒤에는 진골 신분이 왕위를 계승했다.

성골에 관한 기록이 문헌에 따라 약간 다르게 나타나 있어 그 기원이 어느 때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진한 12국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한 신라는 주변지역을 정복·병합하면서

그 지배층을 수도인 경주에 옮겨 살게 했고,

그들을 포함한 왕경인(王京人)을 하나의 기준·원리에 의해 편제한 신분제도로서

골품제를 마련했기 때문에, 성골의 기원을 골품제가 형성되었던 6세기 초반 이전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의 28명의 왕을 성골이라고 한 〈삼국사기〉 기록보다는

제23대 법흥왕부터 제28대 진덕여왕까지의 시기를 중고(中古)라 하고 성골이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

〈삼국유사〉 기록이 보다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성골 신분의 실체에 대해서는 문헌기록이 매우 소략한 관계로 자세히 알 수 없다.

종전에는 성골이 부모 양쪽 모두가 순수한 왕종(王種)이었던 것에 반해

진골은 그 가운데 어느 한쪽의 한 대(代)라도 왕종이 아닌 혈통이 섞인 것을 구분한 것으로,

성골의 성(聖)은 부모 양쪽의 혈통이 신성하다는 의미에서 취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고기(中古期) 왕실이 불교의 진종설화(眞種說話)를 채용함으로써

성골신분이 나타났다고 이해하고 있다.

진평왕은 그 자신의 이름을 석가의 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따서 백정(伯淨)이라고 하고,

왕비의 이름도 석가의 어머니 이름을 그대로 따서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고 했다.

진평왕의 아우 백반(伯飯)과 국반(國飯) 등의 이름도 각각 정반왕(淨飯王)의

아우 백반과 곡반(斛飯) 등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진평왕의 왕실은 인도 카빌라국의 석가왕실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이로써 신라왕실은 불경에 나타나는 찰제리(刹帝利)의 진종설을 그대로 가져다

스스로의 골품을 불교적으로 성화(聖化)시키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왕실은 자신들을 다른 여러 귀족들과 다른 신성한 골족이라고 하여 성골이라고 했던 것으로 본다.

물론 위의 학설이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성골에 관한 결정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여전히 다른 견해가 존재할 수 있다.】

 

 

그 외 육두품, 오두품 등으로 나뉘었지요. 그렇게 형성된 신분에 따라 달리 대접받는 신라였던 것이지됴.

 

 

여기서 다소 길긴 하지만 공부하는 셈치고 신라의 계급제도인 골품제도에 대해 다음백과의 말을 들어봅니다.

【골품제는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골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으며,

두품층은 6~1두품까지 6개의 신분층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3~1두품까지의 두품층은 곧 소멸되어 일반 평민과 동일한 처지가 되었다.

성골은 골족 가운데에서도 직접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신라 최고의 신분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에 의하면 성골은 28대 진덕왕을 끝으로 소멸되었으며,

29대 태종무열왕부터는 진골이 왕위를 계승했다.

진골도 본래는 왕족으로서 각종 특권을 누리고 중앙의 요직을 독점했으며,

신라 하대 혼란기에는 자신의 무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왕위를 차지하는 등

신라의 실질적인 최고 신분층이었다.

이들 진골귀족들은 신분적 특권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게 되었다.

골족 내부에서 성골과 진골의 분류기준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종래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성골은 실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후대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신성시하기 위해

추측하여 부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치원이 찬술한 낭혜화상비문에 신라인 스스로 성골이 존재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성골은 실재했음이 분명하다.

성골과 진골의 분류기준에 대해서는 혼인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보기도 하고,

일정 세대의 친족집단 범위를 벗어났을 때 성골이 강등되어 진골로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현재로서는 진평왕 때에 이르러 그 전에 비해 강화된 왕권을 배경으로 하여,

왕실의 소가족이 나머지 왕실 혈족집단의 구성원과 구별하기 위해 진골보다 상위의 신분으로서

성골을 자칭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리고 중고기 왕족 내에 적극 수용된 불교의 진종설화(眞種說話)도 왕권의 확대와 관련하여 왕실의 소가족이

다른 집단보다 우월한 의식을 갖게 하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법흥왕 이후 불교식 왕명을 채택하는 한편 왕족의 이름도 인도 불가의 이름을 따랐는데,

특히 진평왕은 스스로를 석가의 아버지인 백정왕(白淨王)이라 하고

그 부인을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함으로써,

석가모니의 집안이 다시 전생(轉生)하여 신라의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신성족(神聖族) 의식을 강하게 갖기도 했다.

진골 아래 6개의 두품층은 크게 2개의 신분층으로 구분되었다.

6~4두품은 중앙의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상급 신분층이었으며, 3~1두품은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하급 신분층으로서

일반 백성과 같은 의미로 변화되었다.

이중에서 6두품은 '득난'(得難)으로 불릴 정도로 얻기가 어려운 귀성(貴姓)이었다.

이들은 사로국이 주변 소국을 통합해나가면서 비교적 세력규모가 큰 지역의

지배층을 포섭하면서 부여해준 신분으로 보인다.

6두품은 진골에 비해 관직진출 및 신분상의 제약이 다소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상급 지배층에 속하였다.

또한 6두품은 종교와 학문분야에서 특히 뛰어난 활동을 전개했다.

원효(元曉)와 같은 승려는 6두품 출신 사상가의 대표적 인물이며

신라 하대 선종(禪宗) 승려 가운데도 6두품 출신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들이 종교와 사상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학문분야에서 이들의 진출은 가장 주목되는 현상이었다.

이들이 골품제의 제약 밑에서 진골출신들과 겨루면서 관직에 나가는 주된 길은

학문을 통한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국학(國學)이나 독서3품과(讀書三品科)와 같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

학문적 소양을 쌓기도 하고,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는 경우도 늘어났다.

5두품과 4두품도 상위의 신분층을 형성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국가기관의 잡다한 실무는 상당부분 이들에 의해 처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변화하고 일반 평민의 지위가 상승됨에 따라 4두품도 평민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이와 같이 골품제도는 본래 8등급으로 구분되었으나 성골이 소멸하고

3두품 이하와 평민들과의 구분이 없어진 결과 진골·6두품·5두품·4두품·백성 등 5개 신분층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각 신분층 내부에서 상하이동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신분을 상승시키는 것은 법제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 등에 연루되어 신분이 강등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즉 진골의 가문에서 강등되어 6두품으로 전락하는 사례가 '족강일등'(族降一等)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분이 다른 사람들간의 혼인에 의해 출생한 자식은 부모가 갖고 있는 신분 중

하위의 신분으로 귀속되어 신분이 하락되었다. 골품제도에 편입된 사람들은 왕경에 사는 사람들로 제한되었다.

따라서 지방민은 골품제의 직접적인 규제를 받지 못하고, 왕경인에 대비되어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이들은 경위를 받지 못하고 외위를 지급받았으며,

각종 생활에 대한 규제도 지방민에 대해서 일원적으로 규정한 것은 없었다.

이같이 골품제도가 왕경인에 한정된 신분제로 기능함에 따라 왕경인은 지방민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또한 왕경에 거주하고 있기는 했지만 노비와 같은 천인(賤人)은 골품제도에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골품제는 국가통치력이 미치는 전지역과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후대의 신분제에 비해 불완전한 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옛날 고대국가는 통치력의 강화목적으로 계급사회를 만들었던것 같았습니다.

 

 

양반상놈의 구분이 없어졌다 한들,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도 엄연하게 존재하는 계급적 차이와

신분의 차이는 어쩜 오히려 더 심화된건 아닐런지요.

그저 부와 명예(권력)를 쫓아 줄세우기를 하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시장주의와 평등을 위장한

치열한 계급사회로의 발전이 극에 이르고 있는건 아닌지... 이른바 양극화 현상,

"개천에서 용났다!" 지금은 절대로 믿기지 않는 사라진 말로서만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봐야겠지요.

노력에 상응하는 댓가와 보장이 사라진, 원칙과 상식이 소멸해가는 국가는 결코 선진국도, 중진국도 아닌

야만의 집단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신라의 근간을 형성했던 화랑도 정신을 수련했던곳 화랑연무장 입니다. 이곳에서도 하루에 몇번 화랑의 연무훈련울 재현하는 공연이 펼쳐집니다.

 

 

관람석이 있고, 활을 받아들이는 과녁도 있습니다.

 

 

훈련을 지휘하는 북을치는 망루도 있습니다.

 

 

이곳은 화랑들이 산에서 훈련하며 지내던 산채를 재현해 놓았습니다.

 

 

너와지붕으로 올려진 목조건물입니다.

 

 

연무장을 중심으로 산채가 형성되어있습니다.

 

 

선덕여왕에 출연했던 가마의 모습입니다.

 

 

실제로 성인이 안에 타고 사람의 힘에의존해 움직였다고 한다면 가마꾼들이 상당히 힘이 세야 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마자체의 무게도 상당히 나가보이는 가마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