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맞이 고궁 나들이 창덕궁 후원 -1 (2011년 1월 2일)

2011. 1. 4. 13:58사진 출사지

신년 둘째날 어제 해남 다녀온 여독도 풀렸겠다, 날씨 또한 화창합니다.

집사람에게 바람이나 쐬러나가자고 채근해서 작년 친구들과 만났던 '창덕궁'을 가보기로 했습니다.

원래는 우리고궁의 백미라는 '비원'에 가기위해서 나섰습니다.

한가지 알게 된것은 이 '비원'이란말은 일제가 궁궐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고 원래의 명칭은 '후원'이라고 합니다.

'후원'은 시간별 입장이어서 천천히 한바퀴 돌아보기로 합니다.

우선 '궐내각사'쪽으로 가보기로 합니다.

'궐내각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바라본 '인정전'쪽 모습입니다.

 

 

 

  '궐내각사'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일반적으로 창덕궁에 들어오면 '인정전'쪽으로 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궐내각사'쪽은 지나치기 쉽습니다.

 

 

'옥당(玉堂)'이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옥당'은 '홍문관'의 별칭이기도 합니다.

홍문관의 직제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정1품 영사(領事) 1명(의정겸), 정2품 대제학 1명,

종2품 제학 1명, 정3품 당상 부제학 1명, 정3품 당하 직제학 1명, 종3품 전한(典翰) 1명,

정4품 응교 1명, 종4품 부응교 1명, 정5품 교리 2명, 종5품 부교리 2명, 정6품 수찬 2명,

종6품 부수찬 2명, 정7품 박사 1명, 정8품 저작 1명, 정9품 정자 2명을 두었다.

그후 1746년(영조 22) 〈속대전〉 편찬 이전에 직제학은 도승지가 예겸(例兼)하고,

1785년(정조 9) 〈대전통편〉 편찬 이전에 영사는 영의정의 겸직으로 각각 보완되면서

한말까지 계속되었다. 아울러 홍문관부제학 이하는 해당관아의 문한을 다스리고,

고문(顧問)을 대비하는 업무를 맡으면서 지제교(知製敎)와 사관(史官)을 겸대했다.

홍문관 관원은 대간원처럼 그 업무와 관련하여 능력이 있고 가문이 좋은 인물을 제수했고,

승자·체직에서 의정부·6조 관원에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다.

특히 홍문관관원은 시종기능의 수행과 관련되어 홍문록에 의하여 제수되었고,

국왕의 총애와 신간서적의 사급, 사가독서(賜暇讀書), 음식물을 하사받는 등 대간보다

우월한 지위와 대우를 누렸다.

홍문관은 집현전의 후신으로서 학문연구·시강 기관으로서의 기능과 언론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했다. 또한 유학의 진흥, 인재의 양성에 기여했다. (다음백과)

 

 

 

 

 

입구를 나무통로로 해놓아서 저렇게 아기와 오는 부모, 장애가 있는 사람도

접근하기에 수월한 면이 있습니다. (물론 안쪽 곳곳까지 그렇진 못합니다.)

 

 

문 위의 기와엔 지난번 내린눈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내의원의 '약방'도 이쪽에 있습니다.

 

 

 이곳은 출입문이 낮은 특징을 보입니다. 문 입구엔 '머리조심'이라고 쓰여있습니다.

 

 

궁궐구조도 오밀조밀해서 중첩으로 보이는 장면들이 많아 느낌도 좋습니다.

 

 

멋진건물에 현혹되어 어딘지 모르고 지나쳤습니다. (예문관 인가?)

 

 

'인정전'쪽을 바라보면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해가 잘들지 않는곳엔 잔설이 남아있습니다.

 

 

집사람도 오밀조밀한 궁궐의 구조를 열심히 관람하고 있습니다.

 

 

'인정전'에서 내의원, 예문관으로 통하는 '숭범문(崇範門)' 입니다.

 

 

 

'양지당'에 속해있는 '만복문'의 모습입니다.

 

 

전각과 전각사이가 좁은편입니다.

 

 

'양지당(養志堂)은 임금의 어진(초상화)이나 임금이 쓴 글을 궤에 담아 보관하던곳입니다.

 

 

'양지당'쪽에서 바라본 '인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