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25. 13:51ㆍ간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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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의 삶은 추악 자체
김홍일 장군의 삶은 거룩한 삶이고 본보기이다.
육사생도들에게
'우리나라 청년장교들의 노력은 참으로 칭찬할만 하거니와 좀더 정신적 함양을 쌓되 완숙한 지도능력을 가진 지휘관들이 되시길 바라는 바 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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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홍 일(金弘壹) 선생 (1898. 9. 23~1980. 8. 8)
.1921 연해준에서 대한의용군사회 참모
.1932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 폭탄제공
한국독립당 재정부장
.1945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 겸
한국 광복군 참모장
“놈들의 발굽 아래 정의가 유린되고 민족으로서 혹은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말살되는 이 마당에서 우리가 취할 길은 오로지 투쟁에 의해 국권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나는 판단한 것이다. 또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파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제일차적인 과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자면 한국인 스스로의 군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느꼈던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내가 장차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를 확실히 깨달은 셈이다.”
-선생의 회고록 '대륙의 분노' 중에서.
선생은 1898년 9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진건(金振健)이었고, 위로 두 형님이 있었다. 중국에서 활동할 때, 선생은 왕웅(王雄), 왕일서(王逸曙), 최세평(崔世平), 김홍일(金弘日) 등의 이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고향 동네에서 가장 큰집이 선생의 집이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선생은 상당히 유복한 집안에서 생장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선생이 태어난 곳은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와 이웃하고 있었다. 용암포는 압록강 수운과 황해 해운의 중심지였고, 또 중국 대륙과 마주보고 있었다. 그래서 용암포는 전략적으로도 요충지였다. 때문에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용암포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들었다.
처음에는 러시아 군대가 점령하여 군항으로 삼았고, 그들이 후퇴한 다음에는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의 경험이 선생에게 강인한 반일 민족의식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 군대도 그랬지만 일본 군대는 그들보다 더 한층 그 성격이 포학하여 우리 민족의 재물과 가축을 저희들 마음대로 징발하여 가고도 그들은 한 번도 그 대가를 지불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또 그들의 모자라는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제멋대로 우리 사람들을 부려먹고도 그 대가는 고사하고 도리어 그들을 호령하는 것으로써 낙을 삼고 있었으니 일본군의 그 무지막지한 행패는 나의 어린 마음에도 가위 목불인견이었고, 문득 솟구쳐 오르는 그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비록 어린 나이었지만 선생은 이처럼 일제의 만행을 직접 목격하면서 민족의식에 눈떴다. 나아가 1905년 11월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에 분개하고 원통해 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선생은 반일 민족의식을 더욱 성장시켜 갔다.
특히 당시의 개화 인사들은 을사조약에 따른 국권 상실의 위기 상황을 민족의 실력 결핍 탓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우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아는 것이 힘! 배움으로 힘을 기르자’라고 하는 구호 아래 실력 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 사회의 열기는 선생의 고향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의 부친도 선대부터 경영하던 풍곡재(楓谷齋)라는 서재를 사립학교로 개조하여 민족 교육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선생도 이 학교에서 한학과 신학문을 수학하며 실력을 쌓아 갔다. 하지만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의 부친은 “왜놈의 통치하에 사느니보다는 자유를 찾아야겠다”고하여 가족과 함께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였다. 이에 따라 선생도 봉천에서 고등과정을 수학하다가 1914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2학년에 편입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족교육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오산학교에서 처음으로 민족적인 긍지와 사명감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그때 오산학교의 분위기는 늘 애국애족의 열과 성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교주 남강 이승훈 선생은 학생들과 언제나 같이 지내면서 민족정신을 그의 특유한 방법으로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슴 깊이 심어 주었고, 고당 조만식 선생은 조의조식(粗衣粗食)하면서 민족정신을 국산품 애용으로 솔선 수범하고 계셨다.”
이와 같이 선생은 1918년 3월 오산학교를 수석 졸업하기까지 이승훈과 조만식의 훈도로 민족적 사명감에 불타는 애국청년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오산학교 졸업 직후 이승훈의 권유와 알선으로 선생이 황해도 신천교회에서 설립한 경신학교의 교사로 부임한 것도 그러한 민족적 사명감의 구현이었다. 황해도 신천의 경신학교에서 선생은 오산학교 시절 배운 신지식과 열화와 같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후진 양성에 온 정열을 쏟았다. 하지만 경신학교에서의 교직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것은 선생이 비밀결사 조직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선생은 안악의 김홍량과 진남포의 임치정 등 황해도 지역의 민족운동자들을 순방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일경은 이것을 꼬투리 삼아 선생을 체포한 뒤, 이들과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기도한 것으로 몰아 갔다. 모진 고문 속에서도 혐의를 부인하여 다행히 석방은 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선생은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였다. 선생은 “상해로 가서 본시부터 내가 원했던 중국 군관학교에 유학하여 일본 군국주의 세력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일경의 눈을 피해 1918년 9월 신의주를 거쳐 중국 안동으로 건너갔고, 여기에서 다시 배편으로 상해에 도착하였다.
중국 상해에서 선생은 신규식, 여운형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물론 중국 혁명가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중국 항일구국단장 황개민(黃介民)의 주선으로 선생은 1918년 12월 귀주성 육군강무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선생은 일년간 근대식 군사교육을 받고 임관한 뒤 중국군 장교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3․1운동의 영향으로 만주․노령지역에서 독립군 항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선생은 이에 동참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11월 중국 군대를 나와 상해 임정을 찾아간 선생은 법무총장 신규식과 군무총장 노백린 등을 만나 독립군에 투신할 결심을 밝혔다.
이즈음 한만 국경 지역에서 한국독립군 부대의 빈번한 국내 진공 작전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독립군을 탄압하지 않고서는 한국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1920년 5월 초 일제는 서, 북간도를 비롯한 만주지역의 독립군 탄압을 계획하고, 그 내용을 동삼성 순열사 장작림(張作霖)에게 통고하여 협조하도록 요구하였다. 그 결과 봉천성에는 일본인 경찰고문을 지휘관으로 하는 중‧일 합동수색대가 편성되었다. 하지만 중국측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한국 독립군 탄압에 지극히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때문에 일제는 중국측의 태도를 불신하고 독자적으로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하고, 첫 단계로 ‘훈춘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일본영사관 분관과 일본인 민가를 습격케 하였다. 그리하여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일제는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선전하면서 중국측에 피해 보상와 사후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요구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군대 투입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특히 일제는 마적단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한국인 및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무장단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이들의 의도가 한인 무장세력 즉 만주, 노령에 산재한 독립군 부대의 탄압에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따라 일제는 중국측의 답변이 있기도 전에 대병력을 서, 북간도로 침입시켰다. 한국 독립군 전사 가운데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청산리대첩은 바로 이러한 일본군의 간도 침입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한국 독립군단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만의 밀산에 집결하였다가 이듬해 노령으로 이동하였고, 일부는 압록강 대안의 남만주 오지로 옮겨 진영을 재정비하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하여 갔다. 특히 러시아의 원조를 기대하며 노령으로 이동한 독립군단은 1921년 초 이만에 도착하여 장차 예상되는 대일 전쟁에 대처할 국제혁명군 편성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선생이 임정 군무총장인 노백린을 찾아간 것이다. 이 때 노백린은 “지금 딴 곳에 흩어져 있는 독립군 및 그 지원자들을 모두 한곳으로 집결시키는 중인데, 자신과 이동휘는 유럽을 경유하거나 혹은 몽고 쪽 코스를 택하여 노령에 입국하겠다”고 하면서 선생에게는 곧장 기차편으로 직행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선생은 그 자리에서 시베리아행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이나마 부득이 러시아의 지원을 얻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때문으로 이해된다.
1921년 3월 선생은 노백린으로부터 여러 통의 소개 편지와 함께, “첫째 이번 국제군 창설을 위해서 남, 북만주와 국내에서 최대한으로 지원병을 모집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둘째 혹시 가는 도중에 독립군을 만나거든 그들을 한 곳에 모아 시베리아로 인솔하라”는 지시를 받고 상해를 떠났다. 이후 선생은 길림을 거쳐 돈화현에 도착하여 북간도 국민회장인 마진을 만났는데, 그로부터 장백현에 아직 일부 독립군 부대가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선생을 이들을 인솔하여 노령으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해 3월 29일 장백산백의 밀림을 헤치고 안도현에 도착하여 의군부의 잔여 부대인 군비단을 찾아갔다.
의군부는 한말 간도관리사를 역임한 이범윤이 1919년 4월 조직하여 대일 무력투쟁을 전개하다가 청산리대첩 직후 노령으로 이동하였는데, 군비단은 그 잔여 부대였다. 255명 정도의 독립군 병사로 구성된 군비단은 당시 사령관인 임표와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조경호가 이끌고 있었다. 선생은 이들에게 국제군 창설의 취지를 설명하고 노령 이만으로 이동할 것을 제의하여 동의를 얻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4월 5일 이들을 이끌고 안도현을 떠나 노령 이만으로 가는 2천여 리의 대장정에 나섰다.
그러던 중 4월 8일 천보산에서 일본군과 첫 총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날 밤 선생이 인솔하던 군비단은 천보산 은광지구를 통과할 때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총격전을 벌인 것이다. 하지만 선생의 지휘 아래 군비단은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과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선생의 부대는 안도현을 떠난 뒤 35일 간의 강행군 끝에 5월 10일 최초의 목적지인 시베리아의 이만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독립군 병사들을 각 촌락에 분산 배치하여 숙식, 훈련케 하면서 최종 목적지인 자유시로의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한국 독립군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자유시참변이 발생하였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 부대의 통솔권을 둘러싸고 아군끼리 유혈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극동공화국 한인부에서 조직한 전한군사위원회 산하의 대한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후원 아래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지도하는 고려혁명군 사이에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즉 6월 28일 군정의회 지도부는 대치상태에 있던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한 뒤, 산하의 고려혁명군을 동원하여 이들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쌍방간에 대충돌이 발생하여 사상자가 속출하고, 대한의용군 부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한국 독립군의 투쟁역량이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이러한 자유시참변으로 말미암아 선생은 자유시로의 이동을 포기하고 이만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대한의용군 지도부와 일부 독립군 부대가 피신해 왔고, 이들은 이만에 주둔하고 있던 독립군 부대와 연합하여 그해 7월 ‘소․만 한국 독립군의 총연합’을 목표로 대한의용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에는 김규면(金圭冕)이 추대되었고, 그 무력인 대한의용군사령관에는 이준열사의 장남인 이용(李鏞)이 선임되었다. 선생은 대한의용군 제2중대장에 임명되었고, 또 이 위원회가 설립한 무관학교의 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해 9월 선생은 러시아 흑룡강함대사령관의 요청에 의해 사할린부대 출신의 독립군 병사 20여 명을 이끌고 니콜라예프스크(尼港)로 갔다. 여기에서 선생은 적정 탐지활동은 물론 부하 병력을 이끌고 9월 23일 일본군 초소를 공격하여 12명의 적병을 몰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의 사주를 받는 반혁명군인 백군과의 전투를 벌여 러시아혁명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시베리아 철병의 조건으로 노령 내의 한인 독립군 부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지속적으로 요구하자 러시아 정부는 볼셰비키 혁명의 완수를 위해 이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하바로브스크에 주둔하고 있던 선생의 독립군 부대도 결국 1922년 7월 20일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이만을 거쳐 다시 만주 목릉현으로 옮겨 갔고, 여기에서 동지들과 함께 1923년 9월 중학교를 세워 한 학기 동안 중국어와 수학, 그리고 체육을 가르쳤다. 그리고 1924년에는 최세평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용정의 명동중학교 교사로 한 학기 정도 수학 및 체조를 담당하였다. 그후 잠시 장춘의 형님집에 가 있던 선생은 1926년 10월 일본 헌병대의 촉수가 미치자 바로 그곳을 떠나 상해로 갔다. 이곳에서 다시 광동정부의 동로군총사령부를 찾아간 선생은 귀주 강무학교 동창인 하집오(何輯五) 경비사령관의 주선으로 다시 중국 국민혁명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중국 국민혁명군 총지휘부 소령 참모로 북벌에 참여한 이래, 1927년 7월 절강성 수비 독립경비연대 부연대장 겸 제1대대장, 1929년 오송(吳淞)요새사령부 참모장을 거쳐 1931년에는 상해 병공창의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병기창 주임의 임무는 각종 병기와 탄약을 수집, 정리하여 각 군에 분배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약간의 권총과 수류탄 정도는 재량으로 언제든지 공급할 수 있었고, 이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신기원을 열게 된 것이다.
이즈음 임시정부에서는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와, 1931년 7월 만보산 사건으로 야기된 한중 양 민족의 감정적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특단의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러한 요구는 그해 9월 18일 일제의 만주침략 전쟁 도발을 계기로 더욱 고조되었다. 1931년 11월 임시정부의 별동대로 김구(金九)에 의해 조직된 한인애국단과 그에 의한 암살․파괴활동이 바로 그같은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봉창(李奉昌) 의거는 이러한 한인애국단에 의한 최초의 거사였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동경 경시청 앞에서 신년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오던 일왕 히로히도(裕仁)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이때 던진 수류탄이 바로 김구의 요청에 의해 선생이 마련하여 제공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왕을 암살하려고 한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것은 애석하게도 수류탄을 던진 거리가 너무 멀었고, 또 폭발 위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실패를 거울 삼아 선생은 보다 가벼우면서도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폭탄 제조에 나섰고, 그 결실이 바로 윤봉길(尹奉吉) 의거의 성공이었다. 이봉창 의거가 있자 상해의 반일적 중국 신문들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제히 “한국 사람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 맞지 않았다(韓人 李奉昌 狙擊 日皇 不幸不中)”고 하였다. 일제는 이를 꼬투리 삼아 상해를 침략한 뒤, 그 승전 기념 행사를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홍구(虹口)공원에서 거행한다고 공고하였다. 김구는 이를 박살내 한국인의 독립열망을 국내외에 과시할 인물로 의지가 굳은 윤봉길 의사를 점찍었다. 그리고 선생을 찾아와 의거에 사용할 도시락과 물통형 폭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것은 이 날 행사장에는 도시락과 물통, 그리고 일본 국기만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김구에 요구에 따라 포탄창 주임 왕백수(王伯修)에게 도시락과 물통 폭탄을 만들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완성된 뒤에는 김구를 모시고 병공창에서 시험까지 하여 완벽한 폭탄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4월 29일 윤봉길 의거가 성공할 수 있었으니, 이에 대한 선생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윤봉길과 이봉창 의거를 계기로 중국 조야(朝野)의 여론은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해야 한다는 데로 모아졌다. 그 결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정적 지원과 군사적 협조를 얻게 되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독립운동은 그간의 침체 상황을 불식하고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으니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선생의 지원과 후원은 임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1932년 10월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남경 강릉현의 산중에 조선혁명군사정치군관학교을 세워 독립투사를 양성할 때도 그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특히 1933년 5월 김구와 장개석(蔣介石)의 회담 결과 중국 군관학교에서의 한국 독립군 장교 육성 계획이 실현되었다. 이에 따라 1934년 2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는데, 이때에도 선생의 노고가 있었다. 즉 선생은 한인특별반의 운영을 총괄한 김구를 도와 한국 청년들을 독립군 장교로 육성하는데 힘썼다. 나중에 이들이 한국 광복군의 핵심 요원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 선생이 그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나아가 1937년 12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민족혁명당의 청년 당원 83명이 강서성 성자현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의 특별훈련반에 입학하자 선생은 이들의 교관 노릇을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5월 선생은 소정의 교육을 마친 청년당원들을 인솔하여 무한(武漢)으로 이동시켰고, 이들이 그해 10월 김원봉을 사령으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하는데도 힘을 보태 주었다. 그리하여 조선의용대원들이 중국 각 전구(戰區)에 배속됨에 따라 한중 연합작전을 통한 본격적인 대일 무력투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선생은 1939년 5월 대령에서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중국 제19집단군 총사령부의 참모처장으로 영전하였다. 이후 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하여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 창설을 논의할 때 선생은 김구 주석에 의해 참모장으로 천거되었다. 이는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선생의 공헌이 평가된 것이고, 또한 중국 군사당국과의 원활한 교섭이라는 측면이 고려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선생의 광복군 참모장 취임은 훗일로 미루어졌다. 그것은 이청천 사령관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범석이 참모장에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참모장에 선임되지 못했다고 해서 선생의 광복군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중국군에 있으면서 광복군에 대한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선생은 ‘한국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에 귀속시켜 통할 지휘’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의 자주성을 훼손하는 ‘한국광복군행동 9개 준승(準繩)’의 고리를 풀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이 풀린 뒤 선생은, “바야흐로 우리 조국을 위해 가장 좋은 기회가 찾아 왔으니 한시도 지체할 것 없이 중국군에서 손을 떼라”는 김구 주석의 권유로 중국군에서 나와 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1945년 6월 1일 광복군 참모장에 부임한 뒤, 선생은 김구 주석과 이청천 사령관을 도와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진행되던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에 힘을 쏟았다. 이는 미국전략정보국의 지원 아래 광복군 요원을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국내에 투입시켜 적정을 탐지하고 공작 거점을 확보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 계획은 광복군 요원들이 OSS 교육훈련을 마치고 국내 침투를 기다리던 중 일제가 항복함에 따라 실현되지 못하였다.
해방 이후 선생은 동북보안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된 두율명(杜聿明)의 요청으로 중국군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45년 11월 동북보안사령부 고급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에 취임하여 재만 한인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면서 귀국 편의를 도모하는데 앞장섰다. 1948년 8월 귀국한 뒤에는 국군에 입대하여 선생은 육군사관학교․육군참모학교 교장,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육군제1군단장, 육군종합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고 1951년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후 외무부 장관, 국회의원, 신민당 당수 등으로 활약하면서 조국의 근대화와 민주화에도 기여하다가 1980년 8월 8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5성 장군’ 김홍일 장군과 6·25전쟁 |
가장 어려운 시기에 구국 투혼 발휘한 명장 |
김홍일 장군은 별 다섯 개를 의미하는 오성(五星) 장군이다. 그는 국군 최초의 원수(元帥)나 다름없다. 여기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일찍이 중국군에서 소장까지 승진한 김홍일은 광복 후 귀국해 국군 중장까지 달고 전역한 후 자유중국 대사로 임명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9월 그를 자유중국 대사로 임명한 자리에서 “김 장군이 군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오성 장군으로 제대시켜야 하는데, 우리 군에 그런 제도가 없다고 해서 그리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 장군은 우리나라 별 세 개에다 중국 별 두 개를 보태면 오성 장군과 마찬가지”라며 그의 군공(軍功)을 치하하며 위로했다.
그는 1898년 9월 중국 단동 대안에 위치한 평북 용천군 양하면 오송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밖으로는 영국·러시아 등 서구 열강세력들이 중국 대륙 진출을 기도하고 있었고, 안으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세력을 구축하고자 독일·프랑스·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에 민비가 친러정책을 지향하자 일본은 범궐(犯闕)해 민비를 살해하고 한반도 지배를 놓고 러시아와 각축을 벌이던 험난한 시기였다.그는 어려서 사서(四書)를 독파했고, 부친이 세운 풍곡제라는 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그 후 만주 봉천의 소학교에 다니다가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에 편입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때 조만식 선생이 교장이었다.
졸업 후 그는 이승훈의 추천으로 황해도 신천의 경신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일본 경찰과 충돌 후 중국으로 건너가 귀주강무학교에 입학, 1920년 중국군 장교로 임관했다(22세). 그는 중국군에서 지휘관(소대장·중대장·연대장·사단장)과 고급참모(군단·군사령부 참모처장)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하며 1939년 중국군 소장에 진급했다(41세).
그는 1945년 광복군사령부 참모장이 돼 중국군에서 나왔으나 광복 후 만주지역 한인 교민의 안전을 위해 중국군 소장으로 복귀해 만주접수군사령부 한국교민처장으로 일하다가 1948년 8월 28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뒤늦게 귀국했다. 그는 1948년 12월 10일 국군에 입대, 준장으로 바로 임관했다. 이때 김홍일 장군과 함께 이응준·채병덕·송호송·손원일이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2개월도 안 된 1949년 2월 4일 채병덕·이응준·손원일과 함께 다시 소장으로 진급했다(51세). 그는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낸 후 육군참모학교장 때 6·25전쟁을 맞았다. 그는 개전 초기 채병덕 총장의 지시로 육본 전략지도반장으로 총장을 대신해 서부전선의 1사단을 방문, 전선 상황을 점검한 후 한강 이남 철수를 총장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 방어의 최후 보루인 미아리 전선이 무너지자 채 총장은 중국군에서 대부대 지휘 경험이 있는 유일한 장군인 김홍일 소장에게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의 막중한 직책을 줘 한강 방어 임무를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그는 후퇴한 병력을 수습해 3개 혼성사단을 긴급 편성,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해 미군 증원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육군본부의 지휘 부담을 줄이고 사단을 효율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국군 최초로 1군단이 창설되자 군단장에 임명돼 낙동강 방어선에 이르는 치열한 지연전을 전개, 이를 훌륭히 수행했다.
그는 후진을 위해 군단장직을 용퇴한 후 육군종합학교장으로 재직 중 대통령 특명으로 1951년 3월 중장 진급(53세) 후 전역하고 자유중국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3년도 안 된 굵고 짧은 군 복무를 통해 국가가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구국의 투혼을 발휘, 조국을 구한 명장으로 청사(靑史)에 길이 남아 있다.
민처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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