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17. 07:37ㆍ여행지/경기도
이곳에서 발견된 청동금탁...
보광전 네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풍경이라 합니다.
◇청동금탁의 비밀=“촛대인가, 아니야. 그릇일지도….”
2000년 5월 어느날 점심 무렵. 양주 회암사 6단지를 조사중이던 발굴단(경기도박물관)의
눈에 이상한 유물이 걸려들었다.
보광전 건물지 앞쪽에서 글자가 새겨진 청동유물들이 이리저리 흩어진 채 발견된 것이다.
현장 책임자인 송만영 경기도박물관 학예사를 비롯한 발굴단은 명문(銘文) 청동기의 출현에 아연 긴장했다.
“天寶山中 檜岩寺 普光明殿 四校角~縣琴鐸~”으로 시작되는 글자는 무려 134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명문은 “功德主 嘉靖大夫 判內侍府事 李得芬”로 끝나는 공덕주 이득분의 발원문(發願文)이었던 것이다.
1997년 첫 발굴 이후 처음으로 나온 ‘회암사’라는 이름이었으므로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이 유물의 용도를 알 수 없었으므로 발굴단의 애간장을 녹였다.
하지만 보름도 안돼 수수께끼가 풀렸다.
보광전 북동부 기단부 쪽에서 똑같은 명문 청동기가 출토된 것이다.
결국 명문 중 ‘사교각~현금탁’은 바로 보광전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이었던 것이다.이 금탁은 여느 ‘풍경’과 격이 달랐다.
금탁 상단부에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朝鮮國王(이성계)’ ‘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世子(방석)’ 등의 명문이 새겨 있었다.
또 ‘홍무 27년, 즉 1394년’에 이 글을 썼다는 내용도 새겨져 있었다.
결국 이 금탁발굴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 3년 만인 1394년 국찰인 회암사 보광전을 ‘무학대사와
총애하는 신덕왕후, 그리고 세자 방석을 위해’ 호화롭게 꾸몄다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밝혀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이 불사의 공덕주인 이득분은 누구인가.
고려말 우왕 때 총신이었던 그는 실각했다가 조선개국과 함께 중용된 내관이었다.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를 이어 정종이 즉위(1398년)하자마자 불사를 권하여 국고를 탕진시킨 이득분의 죄를 묻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회암사 보광전을 지나치게 호화롭게 꾸몄다는 죄를 물은 것이 아닐까.
금탁에 새겨진 이름들, 즉 무학대사, 신덕왕후 강씨, 방석 등은 태조의 첫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들인 방과(정종)와 방원(태종) 등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처참하게 찢어진 채 흩어진 인형불상들=발굴단을 소름끼치게 한 것은 목없는 철동·석제 불상들이다.
스님들이 인형처럼 지니고 다니는 20~30㎝ 량의 불상들.
그런데 발굴지에서는 때로는 짓이겨져 부서진 채, 혹은 머리가 무참히 잘린 채 몸통은 이쪽,
머리는 저쪽으로 흩어진 불상들이 수습됐다.
송만영씨의 말. “동자상의 경우엔 네 토막으로 잘린 채 발견됐는데 각각 반경 50~60m 떨어진 채 확인됐어요.
몸뚱이는 5단지, 머리는 6단지, 팔과 다리는 7단지와 8단지, 이런 식으로.
이것은 누가 증오심, 불타는 적개심으로 불상들을 훼손시켜 사정없어 던졌다는 뜻이지요.”
기록을 보자. 태조 때부터 부침을 거듭했던 불교와 회암사는 명종때, 즉 문정왕후가 실권을 잡고
보우를 등용하면서 중흥의 길로 접어든다.
보우는 쇠락해가는 불교세를 확장하고 왕실의 후원을 얻기 위해 1565년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회암사 무차대회를 계획한다.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고 공교롭게도 그토록 믿었던 문정왕후가 죽는다. 그러자 상황은 돌변한다.
조선왕조실록은 “명종 21년(1566년) 송도의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도로 유배된 보우는 끝내 맞아죽고 만다.
그런 보우는 최근까지도 요승(妖僧)의 딱지를 붙이고 다녔으나 요즘에는 품격높은 시문을 바탕으로
불교의 전통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 애쓴 고승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선조때인 1395년 “회암사 옛 터에 불탄 종이 있다”(조선왕조실록)는 기록에 미루어
회암사는 1566~1595년 사이 유생들에 의해 불태워진 것이 아닐까.
◇궁궐과 비슷한 건물배치=회암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인도승 지공 스님의 감화를 받은 나옹 스님이 1374년 중건불사를 했다.
목은 이색의 ‘목은집’ 중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에 따르면 건물 262칸과 15척의 불상 7구 외에
10척의 관음상을 조성했다.
그런데 1997년부터 지금까지 6차 발굴을 끝낸 현재, 55곳의 건물지 조사가 마무리됐는데
전체 건물지 칸수가 256칸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색의 기록과 근접한 수치.
청동금탁과 흩어진 불상들의 발굴성과 외에도 회암사와 관련된 엄청난 비밀들을 풀 수 있었다.
우선 특이한 구들유구. 이 유구는 정면 8칸(31.6m), 측면 4칸(14.1m)의 아궁이, 온돌시설, 부엌,
굴뚝, 계단, 출입시설, 기둥자리가 세트로 발견됐다.
구들은 바닥에서 약 52㎝ 도드라진 형태로 마치 군대 내무반 침상 같다.
건물터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인 8단의 대지에 마련된 건물터,
즉 정청터(政廳址)와 동·서 방장터(方丈址)는 이 절의 품격을 웅변해 주고 있다.
즉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방장의 위치는 한적한 곳이나 경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
또는 부처님을 모시는 주불전의 주변에 자리잡는다.
불법을 호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이 회암사는 방장보다 정청을 더 중요시 여겼다.
정청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방장이 있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준다.
고려말 나옹에 의해 중창이 이루어졌을 때 조성된 이 구조는 조선시대 때도 변함이 없었음을
발굴조사 과정에서 밝혀냈다.
회암사에서 화려한 행사를 펼친 공양왕이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머물던 곳이
바로 정청이었던 것이다.
사찰의 큰 스님이 방장에 기거하면서 왕의 거처인 정청을 직접 보살폈던 것이다.
이 구조는 한마디로 고려의 궁궐인 개성의 만월대와 유사한 건물배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회암사의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또하나 발굴현장에 남아있는 부도는 원래는 보우의 부도로 치부됐으나 지금의 연구결과로는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
제주도로 유배된 뒤 피살된 보우의 부도가 세워졌을 리 만무하다는 것.
최근에는 성종 3년 회암사 중창을 담당한 정양사 주지 처안(處安) 스님의 부도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회암사의 실체는 6년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일반 관광객들도 현장을 찾아오면 발굴단의 생생하고도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으니
‘발굴조사의 전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복원계획을 세울 것인가, 혹은 회암사터 입구에 서있는 레미콘 공장 등
무분별하게 들어선 건물터를 어떻게 철거하고 정비할지가 관건이다.
정비·복원이 잘못되면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조유전/고고학자〉
양주땅을 향하는 왕의 행렬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대가람에 대한 소개와 함께 전각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현해 놓은 문살의 모양이 엄청 화려합니다.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 그리고 태조이성계 등이 등장하는 역사의 퀴즈를 풀어보는 곳입니다.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을것 같습니다.
전시실 벽면도 아주 멋지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선각왕사비를 탁본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탱화도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지공선사, 나옹선가, 무학대사의 모습도 만나볼수 있습니다.
출토된 명발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각종 그릇 역시 많이 출토되어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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