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여행, 천안 독립박물관 - 7】

2010. 11. 22. 16:40여행지/충청남도

독립투사의 단심(丹心)을 의미하듯 붉은단풍이 소나무의 푸르름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왕의 장인인 '구니노미야'를 독검으로 상처를 입혀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한

'조명하의사'의 '유언명(遺言銘'비가 서있습니다.

의사께서 끝까지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심을 한스러워 하시고,

죽어서도 독립운동을 계속 하시겠다는 말씀은 마음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의사께서 타이페이의  옥중에서 남기신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라없는 백성은 오직 노예의 길과 방황만이 있을뿐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관순열사'의 기원'이 새겨진 비석입니다.

어린 소녀의 나이에 저토록 나라를 생각함이 간절하셨다니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도산 안창호선생님의 어록이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현대사의 반독재투쟁의 선두에 섰던 청년들이 어버이 세대가 된 지금,

그 자손들에게 무었을 물려 주었는지...... 또한 지금의 청년들은 무엇으로 사는지......

그야말로 시대의 화두가 되어버렸습니다.  (청년은 남자만을 의미하는것이 아님니다. 靑年 : 푸르른 세대를 통칭합니다)

 

 

도산선생님의 어록을 뒤로하고 작은 소로를 따라 내려갑니다.

 

 

'소해 장건상'선생님의 어록비가 서있습니다.

1882년 12월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12세 서울에 올라와 공립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입학했으나 일본인의 민족차별에 분노를 느껴 도중에 그만두고

1908년 미국 발프레이조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16년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해에 가 동제사에 가담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 3 ·1운동 직후 한인거류민단의

국민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임돼 임시정부 조직을 준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위원으로 활약했다.
1935년 의열단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연합으로 성립된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활약하던 중

일본 영사관 형사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 일제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42년 국내를 탈출해 중경으로 건너간 선생은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 ·국무위원 ·학무부장에 선임됐다.

1945년 4월 임시정부 대표로 연안에 파견돼 조선독립동맹과 항일연합전선 결성에 합의했으나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해 12월 환국해 통일정부 수립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

1974년 5월14일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국가대의를 위하고 민족발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나의 정치적 이상이다'

지금의 정치인들이 반성해야할 부분이군요. 그리고 '국민은 이에대하여 심판할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보수의 모습 아닐까요? 더불어 민주주의 기본 아닐까요?

 

 

비석 옆면엔 선생님의 연혁등이 자세히 적혀있습니다.

 

 

대한독립군이 일제에 부역하고 앞잡이 노릇하는 민족반역자에게 보내는 경고문입니다.

역사에는 가정이란 없다고 하지만, 만일 '반민특위'가 제몫을 다하고, 반역자가 척결 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을까요......

 

 

내려오면서 '겨레의 집'을 바라봅니다.

 

 

강우규 의사 (1859 ~1920.11.29)

 강우규 의사는 1859년 평안북도 덕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과 한방의술을 익혔고 1884년 함경남도로 이주한 후에는 한약방을 차리고

 한의사로 지내며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이동휘 선생과 교류하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1910년 경술국치가 있자 의사는 이미 50중반의 나이였으나 가산을 정리하고 식구들을 이끌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조선의 독립을 의논합니다.

 1915년부터는 길림성 요하현에 한인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신한촌을 건설하고 이곳에

 동광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신한촌은 나중에 러시아와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됩니다.

 1919년 3.1운동 시기에는 신흥동에서 만세시위를 펼쳤고 그즈음 연해주로 가서 대한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한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요하현 지부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강의사는 나이가 든 노인들도 독립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강의사는 그해 6월 25일 블라디보스톡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노인동맹단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고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독립 청원서 제출을 논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가 3.1운동으로 고조된 조선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회유술책으로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우기 위해 새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를 부임시킨다는 것을 알게 된

 강의사는 자신이 신임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러시안인으로부터 폭탄 하나를 구입합니다.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서울 남대문에 잠입한 강의사는 사이토 총독을 환영 나온 인파들과

 삼엄한 경계속에서 열차에서 내려 마차에 올라타려는 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당시 강우규 의사의 나이 64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당시 안중근 20살, 윤봉길 24살, 이봉창 32살.

 1960년 통계청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남자가 51.1세, 여자가 53.7세였으니

 1919년 당시 환갑을 넘긴 64세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총독 암살에는 실패하였지만

 그 곳에 모인 일제관리 등 37명을 사상케 하여 3.1운동 이후 희망을 잃은 국내외 민중들에게

 무장투쟁이라는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순국직전의 강우규의사님의 유시가 새겨져있습니다.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음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건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의사께서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中에서......

도산선생님이나 강의규의사님이나 그저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만해 한용운 대선사 어록'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연못의 풍경을 바라보며......

 

 

멀리 '겨레의 탑'이 보입니다.

 

 

탑의 뒷부분은 무궁화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탑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번여행을 마무리 합니다.

장모님 병환때문에 걱정이 앞선 일정이었지만 어찌보면 가는 세월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그저 아내와 가까운곳이라도 자주 다녀서 나중에 후회라도 없도록 해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