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22. 11:10ㆍ여행지
아침에 일어나 숙소복도창에서 보니 진주성의 멋진모습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횡재했네요. 편안하게 진주성을 바라볼 수 있다니......
아침밥을 먹으러 나왔습니다. 어제만 해도 통영이고 진주고 구름낀 날씨였는데,
아침부터 아주 상쾌한 기분을 전해주는 날씨입니다.
진주청소년문화회관의 모습입니다. 다목적 강당이란 곳도 있습니다.
진주성 촉석문이 있는 곳에 왔습니다. 어제와 달리 사람들은 한산합니다.
진주 남강유등축제 기간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젯밤 불야성을 이루던 유등을 바라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나무아래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간밤엔 굳게 닫혀있던 촉석루가 열려있습니다.
촉석루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멋진 촉석루의 모습이 과연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 답습니다.
글자 그대로 영남에서 가장 뛰어난 풍광을 지닌곳이란 의미입니다.
진주에서 지어진 최초의 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려때 진주목사 김지대가 상주목사 최 자에게 보낸 편지라고 합니다. 편지글이 시와 같이 묘사가 되었다니...
시원한 필체로 쓰여진 촉석루 현판의 모습입니다.
위키백과는 촉석루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
1241년 고려 고종 28년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의 손으로 창건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1]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2]
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59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하였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렬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였다.
의기 논개의 총절을 기리는 '의기사'로 들어가는 지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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