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의 가볼만한곳 한국의 관음성지 덕숭산 수덕사-4】
돌거북 등위에 우뚝선 수덕사 사적비의 모습입니다.
금강문 앞에 섰습니다.
금강문을 지나와 이젠 사천왕문과 마주 하려 합니다.
드디어 본사로 들어서는 관문인 사천왕문에 도달했습니다.
문 안에는 사천왕들이 두눈을 부릅뜨고 잡스럽고, 못된것들의 범접을 막고있습니다.
사천왕의 모습에서 아이들은 막연한 무서움을 느끼겠지요...
허나 속되고 욕된 자들은 어쩌면 태연자약하게 지날런지도 모릅니다.
업이나 과를... 또한 윤회를 믿건 아니 믿건 어질고 착하게 살아야 함을
망각한 사람은 사람으로의 가치가 상실된 미물이라 불러야 옳겠지요.
"선지종찰수덕사"라 쓰인 편액이 멀리 보입니다. 그밑에는 "덕숭총림" 이라 쓰여있습니다.
수덕사를 알리는 안내가 있습니다.
수덕사 창건에 얽힌 설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홍주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수덕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개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덕산 향토지 수록)
새로이 들어선 건물이 있습니다.
자세히 살표보니 '만공기념관'이었습니다.
만공(1871년 ~ 1946년)은 조선과 일제 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현대 불교의 대선사이며, 석가모니 이래 제76대 조사이다.
속세의 성은 송씨로, 송만공으로도 부른다. 경허(75대) - 만공(76대) - 전강(77대)으로 법맥이 이어졌다.
춘성은 한때 그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도 했다. (다음 위키백과)
세월을 알려주는 모습이 곳곳에 있습니다.
만공스님의 일화가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다음 아고라에 올라와 있는 우주식님의 글입니다.
어느 날 제자와 함께 고갯길 산마루를 오르고 있었는데 제자가 다리가 아파 더는 못 가겠다고 하자,
만공이 마침 길가 밭에서 남편과 함께 일하던 아낙네를 와락 끌어안으니 그 남편이 소리를 지르며 좇아오는
바람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고개를 훌쩍 넘었다.
나중에 제자가 "스님,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하자, "이 놈아, 네가 다리 아파 못 가겠다고 했지 않느냐?
덕분에 여기까지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오지 않았느냐"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스승 경허의 일화라고도 하는데,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며 마음을 중시한
경허와 만공의 선풍을 대변하는 이야기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1930년대 말, 만공 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에 주석하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당시 만공 스님을 시봉하고 있던 어린 진성사미(오늘의 수덕사 원담 노스님 이라는 설도 있다)는 어느 날
사하촌(寺下村)의 짓궂은 나뭇꾼들을 따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쳐줄 것이니
따라 부르라는 나뭇꾼의 장난에 속아 시키는 대로 ‘딱따구리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집 멍터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아직 세상물정을 몰랐던 철없는 진성사미는 이 노랫말에 담긴 뜻을 알 리 없었다.
그래서 진성사미는 나중에 절안을 왔다갔다 하며 구성지게 목청을 올려 이 해괴한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진성사미가 한창 신이 나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마침 만공 스님이 지나가다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스님은 어린 사미를 불러 세웠다.
“네가 부른 그 노래, 참 좋은 노래로구나, 잊어버리지 말거라.”
“예, 큰스님.”
진성사미는 큰스님의 칭찬에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봄날, 서울에 있는 이왕가(李王家)의 상궁과 나인들이 노스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청하였다.
만공 스님은 쾌히 승낙하고 마침 좋은 법문이 있은니 들어보라 하며 진성사미를 불렀다.
“네가 부르던 그 딱따구리 노래, 여기서 한 번 불러 보아라.”
많은 여자 손님들 앞에서 느닷없이 딱따구리 노래를 부르라는 노스님의 분부에 어린 진성사미는
그 전에 칭찬받은 적도 있고 해서 멋들어지게 딱따구리 노래를 불러제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자알 뚫는데….”
철없는 어린사미가 이 노래를 불러대는 동안 왕궁에서 내려온 청신녀(淸信女)들은
얼굴을 붉히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때 만공스님이 한 말씀했다.
“바로 이 노래 속에 인간을 가르치는 만고불력의 직설 핵심 법문이 있소.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사람은 딱따구리 법문에서 많은 것을 얻을 것이나,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이 노래에서 한낱 추악한 잡념을 일으킬 것이오.
원래 참법문은 맑고 아름답고 더럽고 추한 경지를 넘어선 것이오.
범부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을 갖추어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뚫린 부처씨앗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텅구리오.
뚫린 이치을 찾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오.
삼독과 환상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중생들이라 참으로 불쌍한 멍텅구리인 것이오.
진리는 지극히 가까운데 있소.
큰 길은 막힘과 걸림이 없어 원래 훤히 뚫린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가깝고,
결국 이 노래는 뚫린 이치도 제대로 못찾는 딱따구리만도 못한 세상 사람들을 풍자한 훌륭한 법문인 것이오.”
만공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그제서야 청신녀들은 합장배례했다.
서울 왕궁으로 돌아간 궁녀들이 이 딱따구리 법문을 윤비(尹妃)에게 소상히 전해 올리자
윤비도 크게 감동하여 딱따구리 노래를 부른 어린 사미를 왕궁으로 초청,
‘딱따구리’노래가 또 한 번 왕궁에서 불려진 일도 있었다.
만공 스님은 다른 한편으로는 천진무구한 소년같은 분이었다.
특히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어린애처럼 손짓발짓으로 춤을 추며 ‘누름갱이 노래’를 부를 때는
모두들 너무 웃어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고 한다.
오랑께루 강께루
정지문뒤 성께루
누름개를 중께루
먹음께루 종께루
한국 불교계에서 첫째 가는 선객, 만공 스님은 타고난 풍류객의 끼도 지닌 분이셨다.
1946년 어느 날 저녁, 공양을 들고 난 스님은 거울 앞에 앉아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을 동고동락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 동안 수고했네"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조계종 총무원장이면 불교계의 최고 수장... 만공스님 처럼 그런분은 없을까...
갑자기 이런 기념석을 보니 만공스님 생각이 납니다.
만공스님이 건립하신 수덕사 7층석탑의 모습입니다. 특이한건 아래에 기단부가 없이 그냥 쌓아올렸습니다.
석탑옆에 놓여진 주춧돌 같은 곳에도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미소가 석탑을 감싸고 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