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20. 08:43ㆍ여행지/경상남도
다시 돌아왔습니다.
지난번 조카가 있는 진주에 다녀왔는데,
그 이야기로 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여행으로 간 것이 아니라 조카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진주입니다.
하지만 먼 길을 갔는데, 그냥 오기에는 누님께서 서운 하실 것 같고, 온 가족이 진주성으로 향했습니다.
2년전 에 통영여행하면서 올라오는 길에 진주에 들렸답니다.
당시에 진주 남강 유등축제가 열렸기에 겸사겸사 들렸지요. 물론 조카는 당시에 진주에 있질 않았답니다.
이곳 진주성은 행주대첩, 명랑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지의 한 곳입니다.
이곳에도 충무공의 시호가 내려진 김시민장군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잠시 김시민 장군에 대해 배워보고 갑니다.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들어갔다.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尼湯介)가 회령(會寧)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를 편성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주로 향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창원 등을 회복했다.
이어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거창 사랑암(沙郞巖)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이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이해 10월 적 2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등,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뒤 죽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그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다음백과.
전에 왔을 때는 촉석루 쪽을 보고 갔습니다.
이번에는 작게나마 동선을 잡아가면서 돌아보기로 합니다. 일단 영남포정사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겨봅니다.
관광객에겐 유서 깊은 역사의 배움이 되고, 진주 시민에겐 아름다운 공원이 되어주는 곳이 진주성이라 하겠습니다.
널따란 잔디밭도 좋고, 푸르른 나무들이 있어 좋습니다.
저런 녹음이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줍니다.
이곳 영남포정사는 경상남도 관찰사의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 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도백의 거처 출입문 쯤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누님과 조카 내외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수령 이하는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가 있습니다.
진주성 비석군이 보입니다.
진주성과 진주시내 일대에 있는 비석을 모아 놓았다고 합니다.
아마 열녀비 정도를 빼고 나면 아무래도 지방 관리의 자기자랑도 어느 정도 되리란 생각도 듭니다.
성에 있는 암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석물들이 있어 궁금했습니다.
용다리 전설이란 설명이 있어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전설의 흔적이라 합니다.
장대의 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을 합니다.
바로 두 곳의 장대 중 한곳인 진주성 북장대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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